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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겨울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지룡아, 너 어디가니 - 김수봉

신아미디어 2013. 1. 30. 21:54

"눈도 귀도 없는 녀석, 무슨 감각으로 제 길을 저렇게 더듬어갈까.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길만 간다."

 

 

 

 

 지룡아, 너 어디가니


 

   지렁이 한 마리가 온몸으로 기어간다.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해진 흙 속에서 금방 나온 듯 몸에는 윤기마저 흐른다. 볼펜 길이만 한 몸뚱이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필기체 알파벳을 쓰기도 하고 한문 초서의 획을 긋기도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 살던 땅굴에 빗물이 흥건해져서 좀 더 쾌적한 땅을 찾아나선 걸까. 천적인 두더지나 땅강아지의 공격이라도 받고 긴급 피난을 나온 건가. 혹시 비가 오면 만나자고 한 지렁각시라도 찾아가는 것인가.
   눈도 귀도 없는 녀석, 무슨 감각으로 제 길을 저렇게 더듬어갈까.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길만 간다.
   장난삼아 풀잎 한 줄기를 뽑아 몸뚱어리를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다. 몸을 뒤치며 뒹굴 듯 속도를 낸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대신 그 피부는 고감도의 기능을 가진 것인가.
   잠시 후 위험을 벗어났다고 느꼈는지 다시 느리게 제 갈길을 또 간다.
   흙을 먹고 흙속의 유기물질을 분해하여 분변토를 배설하는 지렁이. 앞쪽에 입이 있고 뒤 끝에 항문이 있으며, 암수 한몸인 이 미물. 땅과 사람을 이롭게만 해주는 존재다. 그의 몸엔 아무 독성도 없지만 사람들은 지렁이를 보는 시각이 매우 부정적이다. 어느 해 장마철, 수돗물에 지렁이 한 마리가 휩싸여 나왔다 해서 신문 방송에 대서 특필된 일도 있다.
   지렁이의 유익함을 잘 아는 사람들은 토룡土龍이라 부르기도 하고, 요즈음은 가축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옛날 아주 못된 며느리가 있었다. 서방은 강제 노역에 뽑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먼 길을 떠났다. 떠나며 홀어머니를 잘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홀어미는 청맹과니였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귀찮고 미웠다. 밥도 제때에 주지 않고 하루 한 차례씩 나물죽 그릇만 디밀었다. 그래저래 죽기만을 바라며.
   몇 해가 지나 아들이 노역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걱정을 했던 어머니는 외려 혈색이 좋고 건강하지 않은가. 절을 올리는 아들을 옆에 앉히고 어머니는 며느리 찬사부터 했다. 며느리가 날마다 고깃국을 끓여주어서 이렇게 잘 살았노라고. 아들은 가난한 살림에 무슨 고깃국이냐고 물었다.
   “눈이 봬야 무슨 고긴지 내가 알지. 이거란다.” 하며 삿자리 밑에 넣어뒀던 것을 꺼내 보였다.
   “윽! …….” 마른 지렁이 몇 가닥이었다.
   어린 시절, 텃밭이 넓은 시골집에 살 때는 여름밤마다 멀리서 가까이서 길게 우는 지렁이 소리를 흔히 들었다. 지렁이가 소리를 낸다고?
   낮에는 풀숲에서 울어대는 씨르래기 소리를 귀 따갑게 들었고, 밤에는 멍석에 누워 총총한 하늘 별을 보면서 듣던‘뚜르르르……’소리. 그 긴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밤에도 씨르래기가 울어?”
   “아니란다. 저건 지렁이 노래여. 지렁각시 부르느라고.”
   그래서 예부터 지렁이를 가녀歌女라 부른다고도 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본 지렁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한문 이름 지룡地龍에서 지렁이가 됐다는 너.
   지룡아, 너 가는 길 결코 순탄치만은 않아. 땅속보다 땅 위는 몇 갑절 더 험난하단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과 자동차 바퀴, 너를 찍어댈 온갖 부리들이 나무 위를 날고 있고, 햇볕 아래선 개미 떼도 너를 물고 늘어질 거다. 제발 사람이 만들어놓은 콘크리트 길 위엔 올라서지마라. 거기엔 물 고인 웅덩이도 있어, 한 번 빠지면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한 너희들 모습을 나는 많이 보았단다.
   부디, 네 갈 길을 잘 가서 쾌적한 새 땅을 찾아들어라. 그리고 오늘밤엔 ‘뚜르르르……’ 힘차게 울어주렴. 저 지난날 하늘 별을 쳐다보던 멍석 위에 내가 다시 누울 수 있게.

 


김수봉  ---------------------------------------
김수봉님은 수필가다. 작품집으로『전라도 말씨로』,『소쇄원 바람소리』, 『삼밭에 죽순나니』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