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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겨울호, 다시읽는 좋은수필] 돈 백만 원 - 유재철

신아미디어 2013. 1. 22. 18:44

"각다 못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여름 운동복 주머니에 휴대폰 늘어진 것처럼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소유한 자의 불편함을 처음 느껴보았다."

 

 

 

 

 돈 백만 원

 

   돈 백만 원이 생겼다.
   돈 백만 원이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여름 벼농사와 겨울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으면서 이렇게 아끼고 저렇게 살뜰히 푼돈을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든 것이다. 목돈이 생기기도 전에 써야 할 일이 먼저 생기던 생활에, 백만 원을 들이 밀어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일 푼돈을 모으기는 했지만 그냥 생긴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백만 원이 묶인 돈뭉치를 보고 있노라니 여느 돈과는 달리 세종대왕님 용안이 환하게 보였다. 이때까지 낱장 만 원짜리 돈에서 보아왔던 세종대왕님 얼굴하고는 판이하게 달랐다. 백만 원을 은행에 예금하려 생각하니 공과금 내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통장에 있는 백만 원보다 소유하고 있는 현금 백만 원의 뿌듯함을 느껴서 집에다 보관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그때부터 전에 없던 걱정이 생겼다. 소유한 자의 걱정이라 할까. 외출을 하자니 집의 돈이 걱정이 되었고, 집안에 앉아서도 방범창의 부실함을 걱정했다. 도둑이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집구석에 앉아서 들이닥치지도 않을 도둑을 염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생각다 못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여름 운동복 주머니에 휴대폰 늘어진 것처럼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소유한 자의 불편함을 처음 느껴보았다.
   돈 백만 원이 끼치는 불편함이 꽤나 큰지라, 집안에 물건 하나 들여놓는 것으로 백만 원을 없애기로 했는데 문제가 불거졌다. 세탁기가 탈수가 안 되어서 가끔 짜증을 내던 아내가 생각나서 세탁기를 교체하려 했더니, 세탁기란 놈이 빙글빙글 웃다가는 종래에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지르며 세탁물의 물기를 쫙 뽑아내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화면이 고르지 않고 흐렸었는데, 그렇다면 텔레비전을 바꿀까 하고 화면을 쳐다보니 텔레비전의 화면에 비치는 하늘의 파란색이, 애국가 3절에 나오는 가사 중‘공활한 가을 하늘’보다도 더 새파랗게 비치고 있었다. 주방에 바꿀 물건 있나 기웃하고 보니, 가스레인지는 파란 불꽃을 날름거리며 놀리고, 전자레인지는 나 멀쩡하니 신경 끄라고 소리 윙윙 지르지, 식기건조기는 작은 불빛을 껌벅이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혹시나 해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졸고 있던 냉장고가 놀라서 불을 번쩍켜며 어서 문 닫으라고 냉기를 쏘아서 기겁을 하고 문을 닫았다.
   돈 백만 원의 사용처를 찾아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아내 옷 한 벌 사주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옷 한 벌 사주겠다는 말을 들은 아내는 항시 강의 억새같이 뻣뻣하던 태도가 봄날 새순처럼 부드러워졌다. 돈 백만 원의 사용처를 이제야 제대로 잡은 것이다. 돈 백만 원의 위력 때문이었는지 시내 오일장에서 망설이며 들었다 놓았던 옷들이 하찮게 보였다. 오일장을 비켜서 의류매장을 찾았다. 옷을 고르던 아내가 옷 하나를 골라 걸치고서는 입이 귀에 걸렸다. 옷보다도 그 입이 보기 좋았다. 아내는 입으라고 사온 옷을 입지는 않고 몇 번이며 장롱에서 꺼내보며, 자린고비가 밥상 위에 매달린 굴비 보듯 하였다.
   어느 날 드디어 그 새 옷을 입을 기회가 생겼다. 부부동반 모임 초청장이 왔다. 그날 아내가 사온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면 날씨가 추워야 하는데, 자비로우신 하늘의 도우심으로 날씨 또한 엄청 추웠다. 아내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한데, 이 추운 날씨야말로 아내에게는 꽃피는 춘삼월 소풍날처럼 느껴졌으리라. 모임 시간이 어두운 저녁이라 금의야행을 한다는 것이 한 가지 흠이기는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을 수 있다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임 장소 밖에 벗어놓은 신발과 안에서 왁자지껄하게 들리는 소리로 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몇 달 전 야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 만나기를 몇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 인사 나누듯 하며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인사를 하느라 모인 사람들을 일일이 누볐지만, 실은 그 옷을 자랑하고픈 마음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옷에 대해서 얘기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자 아내는 풀 빠진 옷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다.
   무리에 동화되어 한창 얘기가 오가는데, 아내가 앉은 뒤쪽 구석자리에 개어진 옷 한 벌에 눈이 갔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한 결 고운 모피 코트 한 벌이, 들기름 발라서 방금 구워낸 김마냥 날아갈 듯이 개어져 있었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갔는데 좌중의 한 사람이, 돈이 조금 생겼기에 오늘의 술값은 자기가 내는 것이니 많이 들라고 말하였다. 농지를 샀다 팔아서 차익을 남겼는데, 뭐? 미등기 전매라나? 뭐라나. 그때 남긴 차액이 몇 푼 된다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 몇 푼이 몇 억이라는 것을 알아듣고는 음식을 먹던 입이 벌어졌다.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땅에서 일 년에 두 번 농사를 지어 몇 푼이 생겼다고 여유를 부렸는데, 저녁 값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땅을 일 년에 두 번 거래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 큰돈을 벌고도 몇 푼이 되지 않는다고 가볍게 말하는데, 다음에는 더 큰 건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부부가 여유를 부렸던 돈 백만 원이 세상에서는 하찮은 잔돈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가 길에 아내는 두꺼운 옷을 걸쳤음에도 추운지 짧은 허리를 구부리고 아무 말없이 밤길을 걸었다.
   옛날 산골에 사는 노부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 있는 돈을 다 합하면 일억 원은 될 거야, 하고 말하자 할아버지가 되받아 말하기를,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그 병신 같은 소리 하지를 말아, 아마 백억 원은 될 거야 했다는 말이 있다.
   우리 부부가 그 노부부 짝이 난 것이다.

 


유재철  -------------------------------
유재철님은 수필가이며 수필집『맙소사 우리 집』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