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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겨울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현이의 연극 - 이경희

신아미디어 2013. 1. 14. 22:00

"조금 전만 해도 주위의 모든 관객들이 현이를 보러 온 것 같았는데, 그 사람들은 각자가 다 지금 한 가지씩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의 가족들이고,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현이의 연극


   두 시까지 오라는 현이의 말대로 부랴부랴 시민회관으로 갔다. 현이가 예술제에서 연극에 출연하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출연하는 연극「숲속의 대장간」은 제2부의 첫 순서에 있었다.
   풀잎 역을 하게 되었다는 현이가, 그동안 매일 학교에서 늦게 오고, 휴일에도 학교에 나가 연습을 하곤 할 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공연하는 날이 되니까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현이 혼자의 발표회나 되는 것처럼 흥분되어, 2부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무척 초조했다. 나는 현이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장을 해야 하니까 일찍 가야 해요.” 라며 부산을 떨던 현이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르면서, 혹 무대 위에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국민학교 3학년인 현이는,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마 더욱 흥분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제2부가 시작되는 종이 울리고 이어 불이 꺼졌다. 막이 오르자, 캄캄한 무대가 나타났다. 무대 중간을 비추고 있는 조명 속에 선녀仙女가 서 있었다.
   얼마 전에 현이가 모자 달린 푸른색의 옷을 가지고 와서,
   “선녀 옷은 참 예쁜데, 참새 옷도 예쁘고…….”
하며 자기 옷이 덜 예쁜 것에 대해 서운한 빛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말한 선녀인 것 같았다.
   얼마 후, 선녀는 없어지고 밝아진 무대 한가운데에 대장간이 생겼고, 그 뒤는 숲이 울창하였다. 나는 현이가 언제 나올 것인가 열심히 지켜봤다. 숲 속에서 참새와 까치 떼가 대장간 앞마당에 날아와서 놀고 춤추는 장면이 나왔지만, 풀잎 역을 맡은 현이는 그때까지도 눈에 띄질 않았다. 나는 무대를 계속 지켜보며 현이의 모습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부터 대장간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숲 속에서 합창단원 모양의 대열을 짓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에 눈이 갔다. 나는 그것이 풀잎들인 것을 알아냈다.
   ‘현이가 바로 저기, 저 많은 풀잎 중의 하나로 끼여 앉아 있는 거구나!’
   순간, 지금까지 흥분해 있던 마음이 가시고, 실망되는 마음조차 터놓을 수 없는, 그런 야릇한 기분에 싸이고 말았다. 현이는 바로 그런 역을 맡고 있었다.
   대장간 앞뜰에는 토끼도 나오고, 포수도 나오고, 동네 여인과 대장간 주인도 나와 익살스런 대화를 주고받고, 그리고 때때로 참새 떼와 까치 떼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풀잎들은 계속 줄지어 붙어 앉아서 양손에 든 풀잎 그림판만 가끔 흔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양손에 든 풀잎 그림판으로 얼굴을 노상 가리고 앉아있기 때문에, 그 많은 풀잎 중에서 어느 애가 현이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현이가 풀잎 역을 맡게 되었다고 했을 때, 저의 언니가,
   “너도 뭐라고 말하는 것 있니?”
하니까,
   “그러엄!”
하길래, 제대로 무대에서 연기도 하고, 대사도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정확히 말을 한다면야, 풀잎들도 다 함께 입을 모아 무어라고 함성을 지르곤 하니까, 아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긴 하였다.
   조금 전만 해도 주위의 모든 관객들이 현이를 보러 온 것 같았는데, 그 사람들은 각자가 다 지금 한 가지씩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의 가족들이고,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나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장면을 보는 대신, 다닥다닥 두 줄로 붙어 앉은 풀잎의 움직임만을 보았다. 그 속의 어떤 풀잎이 현이인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손에 든 그림판을 양옆으로 흔들 때에만 살짝살짝 보이는 얼굴이라, 그 순간에 현이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풀잎도 현이 같고, 저 풀잎도 현이 같고……. 현이 같다는 생각을 하면 하나같이 현이라고 생각 안 되는 풀잎이 없었다.
   사실 우리 집 애가 반드시 남의 눈에 띄는 중요한 역을 맡아야 한다든지, 조금이라도 나은 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엄마는 자기 아이한테 제일 먼저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이가 눈에 띄지 않는 데에 실망하였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연극은 끝났다. 나는 현이를 찾으러 아래층으로 갔다. 얼굴에 빨갛고 꺼멓게 분장을 한 아이들 틈에서 한참 만에 현이를 찾았다. 물론 현이 쪽에서 먼저 엄마를 부른 것이다.
   “엄마! 나 하는 것 보았어요?”
   현이는 나를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이럴 때 보았다고 해야 할지, 못 보았다고 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망설이면서,
   “응, 현이가 어느 쪽에 앉아 있었지?”
   나는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혹시 못 보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실망하는 게 아닌가 눈치를 살폈는데, 현이는 의외로 밝은 얼굴을 하며,
   “둘째 줄 끝 쪽에 앉아 있었어요.”
하더니,
   “엄마, 그럼 나 못 보았지? 아유, 난 내 뒤에 참새가 앞으로 나가면서 건드리는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서, 그것을 엄마가 보았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금방 집어 썼는데, 엄마 못 봤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현이의 이 말에 또 한 번 마음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눈에 잘 안 띄는 풀잎역을 하였지만, 현이는 풀잎으로서의 자기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엄마가 자기를 꼭 보아 주리라는 확신 때문에 더욱 열심히 연기를 하였고, 오히려 자기의 실수를 엄마가 보았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다.
   결국 현이가 그러한 실수라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보지 못한 데 대하여 실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분장을 해서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현이에게 먹을 것을 조금 사준 다음, 다음 순서를 보기 위해 자리로 돌아왔다.

 

 

 

이경희   ---------------------------------------
이경희님(1932~ )은 수필가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이고 펜클럽 회원으로서 수필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수필집『산귀래山歸來』『, 뜰이 보이는 창窓』『, 현이의 연극』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