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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겨울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시골 버스 - 정재은

신아미디어 2013. 1. 10. 07:36

“대추 보고 못 먹으면 늙는다더라. 나 같은 인생, 얼굴에 골짝 지면 볼일다 본다구.”

 

 

 

 시골 버스

 

   깊고 외진 추곡湫谷약수터에 유일한 문명의 이기가 있다면 하루 세번씩 들러 주는 마이크로 버스가 있을 뿐이다.
   한 달간의 휴양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날, 우리 모녀 3대代는 10시 첫차를 타려고 짐을 꾸려 들고 9시 반에 차마당으로 내려왔다.
   10시 첫차는 12시에야 들러 주었다. 고사리·더덕·버섯 등 산나물 곁들인 큰 보따리 세 개를 선뜻선뜻 차에 실어 주는 총각조수의 서비스에 두 시간 기다린 짜증이 봄눈 녹듯 한다.
   두툼하고 텁텁하게 생긴 운전수가 차를 손보는 동안
   “춘천 손님 없어요. 춘천 손님요─.”
   조수가 약수터 마을을 한 바퀴 외치며 돌고 와 드디어 차는 털털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십 리쯤 나와 십여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우체부 댓 명과 작부 타입의 뚱뚱한 여인이 휘발유통 같은 것을 네댓 개 싣고 올라탔다. 우체부들과 그 여인은 친숙한 사이인 듯 반말 농지거리로 떠들썩하다. 한 우체부가 주머니에서 풋대추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차 안이 더욱 짝자글해지면서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다.
   “대추 보고 못 먹으면 늙는다더라. 나 같은 인생, 얼굴에 골짝 지면 볼일다 본다구.”
   여인이 반협박조로 두 개를 먼저 얻어든다. 너도나도 내민 손에 대추가 두 알씩 골고루 돌아간다. 주머니에서 마지막 털어낸 듯, 세 개를 쥐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딸아이 손에 쥐어주고는 빈손을 털며,
   “허, 자식 많은 사람 이마 펼 날 없다더니, 느들 거느리구 댕기다 내 창자에 먼지 끼겠다.”
   “얼씨구, 자식 먼저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구 너두 세상 밖에 나왔구나.”
   차 안이 따르르르 웃음판이 된다. 운전수는 장난꾸러기 병아리들을 거느린 어미닭처럼 의젓이 운전만 한다. 차는 그새 내평內坪이라는 곳 까지 와 있다. 집도 학교도 논밭도 모두 수마에 할퀸 자국만 앙상한 수해지구였다.
   이곳에서 우체부 한 사람이 내렸다. 외딴집만 띄엄띄엄한 골짜기에 한 통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수십 리 산길을 걸어야 할 것이 뻔하다.
   짙은 녹색의 소양강을 옆구리에 끼고 한참 달리니 다 쓸려간 폐허 위에 용케 벽만 남은 집터가 하나 있다. 여인이 차를 세운다.
   “이봐, 조수. 그 술통 두 개만 떨어뜨려 줘.”
   “이 길바닥에유?”
   “응. 오늘쯤 갖다 놓을 줄 알고 나와 볼 거여. 내일이라두 들여 가겠지.”
   두 개의 술통이 길가에 내려지고, 우체부가 또 한 사람 내렸다. 차가 다시 떠나는데
   “여봐, 안安, 안安.”
하고 여인이 내린 우체부를 부른다. 차가 속력을 늦추어 준다.
   “더덕리大德里들어갈 거지? 들어가거든 김金네 보구 여기 술통 띠어놨다구 전해줘.”
   조금 더 가니 판잣집 두어 채가 눈에 띈다.
   “누가 그래두 집을 웅둥그려 놓았네.”
   하던 여인이 별안간 차창 밖에 대고 소리친다.
   “아이구, 아줌마 살아있었네.”
   차가 또다시 속력을 늦추어 준다.
   “어이구 아줌마, 용케 살았수그려.”
   판잣집 앞에 섰던 여인이 반색하며 달려 나온다.
   “그럼, 살지 않구. 사람 목숨이 그리 힛거분가.”
   수인사가 대강 끝나니 차가 다시 속력을 낸다.
   “얘, 여긴 참말 사람 위에 차가 있구나.”
   어머니가 내 귀에 대고 감탄하신다.
   우체부들은 어느새 하나씩 다 내리고 농부 차림의 남녀가 자리를 메우고 있다. 어느 곳에서 시골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타셨다.
   “얘, 찬바람 일거던 여러 생각 말고, 어린것들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너라.”
   수재민이 된 딸네 천막을 다녀가는 늙은 어머니의 굵은 주름을 타고 눈물이 굽이진다.
   “걱정 말아유. 산 목숨에 거미줄 칠까유.”
   울먹이는 딸의 음성을 흘리며 차는 다시 떠난다. 차 안이 별안간 숙연해진다.
   “다 먹게 된 곡식 죄 쓸려버리구 어떻게들 살아갈지.”
   “소양강댐 만든다구 보상금꺼정 다 준걸, 요번 추수 한 번만 더하구 떠난다다 이 변을 만났잖아유.”
   늙수그레한 중년남자가 할머니에게‘백조’한 개비를 권한다.
   “죽을 구멍 피하면 살 구멍두 나서는 법이유. 목숨 살았으면 천운이지유.”
   차는 어느덧 소양강 다목적댐 공사장터로 들어섰다. 차 안이 감탄으로 술렁인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어느 게 무엇인 줄도 모르겠고, 부지런히 왕래하는 노란 차와 사람들, 높은 시멘벽과 철근들, 울던 할머니도 눈물을 거두고 입을 벌린 채 바라본다.
   거친 길은 끝나고 아스팔트 길로 들어서며, 미구에 춘천 시내에 닿았다. 손님은 다 내리고 우리 세 식구만 남아있다.
   시내의 한 농약사 앞에 차를 세운 운전수가 주머니에서 착착 접은 종이를 꺼내어 펼치더니, 몇 가지 농약 이름을 불러주며 빨리 사오라고 조수에게 재촉한다.
   “오늘두 뭐 많아유?”
   “명신 하숙집에 북어 한 쾌, 생철집에 이명래고약 두 개, 활명수 큰거 한 병…….”
   운전수와 조수는 산골 외진 마을의 장 심부름까지 겸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지나온 소양강변 길은 댐 완공과 더불어 물속에 잠기고 만단다.
   억수가 쏟아져도 끊길 염려 없는 신新도로가 높은 산 중턱에 이미 널찍이 닦여져 있다. 정情든 구도로가 없어져도 낡고 조그만 이 마이크로 버스는 순박한 농민들의 웃음과 눈물, 갖가지의 애환을 가득 싣고 내일도 모레도 탈탈탈 달려 줄 것이다.

 


정재은  ----------------------------------
정재은님은 충북 충주 출생(1937 ~ 1996)으로 충주여고를 졸업했으며, 수필가이다. 1960년 여원사 여류문학상소설부문을수상하고,『수필문학』지를 통해 등단했다. 현대수필문학상을수상했으며, 수필문학진흥회 이사를 역임했다. 수필집에는『돌배의 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