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닦는 ‘길’에도 중용이 필요한가 보다. 그러나 나는 이 ‘길’에도 중용의 덕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구두
구두는 사람의 풍채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구질구질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친구를 보면 얼굴이 다시 한 번 보이고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뜩이나 시원한 일보다는 기가 탁탁 막히는 일만이 많은 우리네 살림에서 구두쯤 못 닦고 남에게 불쾌한 감을 줄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요즈음 거리에 나가거나 다방에 앉아 있을라 치면 웬 구두를 닦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냐. 아마 거리를 다니고 다방에 앉아 있는 신사 숙녀 중에서 구두를 닦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라 해도 그것은 필시 힘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구질구질한 구두를 신은 사람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치어다 보이듯이 너무 광채가 휘황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도 나에게는 적지않이 불쾌한 감을 준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 비참하게 생각되기까지 한다. 구두 닦는 ‘길’에도 중용이 필요한가 보다. 그러나 나는 이 ‘길’ 에도 중용의 덕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 집 붙장안에 마련되어 있는 구두약은 껍데기는 과연 일류 박래품이지만 속살은 최하급 국산품이다. 물론 여편네가 속아 사가지고 온 위조품이다. 구두약을 바른다고 하기보다는 물감을 들인 밀초를 바르는 것 같은 감이 든다. 그래저래 나는 좀체로 구두약을 찾지 않게 되었고 나의 구두는 술을 마신 이튿날이 아니면 대개는 처참한 외모를 하고 남에게 불쾌한 감을 주고 있다.(술을 마신 이튿날은 흙이 묻은 구두 위에 여편네가 구두약 아닌 ‘밀초’ 를 발라놓기 때문에)
일전에도 시인 Y하고 선배 C여사의 문병을 가서 구두 때문에 꾸지람을 받은 일이 있다. 인사를 마치고 마루로 나와서 구두를 신는데 C여사가 지대돌 앞까지 따라나와서 내가 구두를 신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몹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유! 구두끈이나 좀 바꿔 끼세요.” 하고 소리를 질러 웃음판이 벌어졌다. 하기야 이런 무안은 되도록이면 더 받아보고 싶은 무안이지만 나는 그 후에 곧 구두끈만은 바꾸어 끼었다.
그런데 이 구두로 인해서 또 한 번 큰 웃음판이 벌어졌다. 다른 게 아니라 요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
워낙 동리가 가난한지라 도둑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대개가 문단속 같은 것에 각별한 경계를 하지 않고 지내는터라 우리 집의 나지막한 초라한 대문에도 빗장 대신에 가느다란 철사를 말아서 걸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문짝이 덜컹거리는 달밤을 타서 도둑은 유유히 그 동아뱀꼬리만 한 철사를 펴고는 들어왔다.
툇마루 끝에 놓아둔 양은주전자를 잃어버린 것이 손해의 전부였지만 집안식구들이 놀란 값은 그 주전자의 백 배도 천 배도 더 되었다. 도둑을 집 안에서 당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도둑이 다녀나간 것을 발견한 여편네는 “여보! 도둑이 들었어요……. 마루 끝에 신발이 모두 흩어진 것 좀 일어나 보세요…….”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고 잠자는 나를 보고 고함을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엇 잊어버린 것 없나?” 하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어머나, 그래도 당신 구두는 안 집어갔구려. 여기 이렇게 마당 한가운데에 팽개쳐 놓고 달아났어요.…… 아마 구두를 가지고 가려다 보니 하두 거지 같애서 안 가져간 거야.” 하고 여편네는 놀란 중에도 깔깔대면서 좋아하는 것이다.
김수영 ---------------------------------------------
김수영님(1921 ~ 1968)은 서울 출생으로 시인이다. 저서로는『거대한 뿌리』,『 사랑의 변주곡』,『 시인이 여기침을하자』『, 김수영전집』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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