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또한 한 사망자에 불과하다는 뚜렷한 사실 앞에서 수치감을 갖고 입 끝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이론을 더 연장시킬 용기를 잃고 말았다."
사망통고서
“이봐, 박군!”
“뭘?”
“천하에 이런 해괴한 일도 있나?”
“뭔데?”
“옛네, 읽어 보게.”
나는 K군이 주는 사륙배판형의 모조지에 인쇄된 글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새파랗게 살아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죽었노라고 부고문을 인쇄해서 각지에 배포한 것인데, 그 전문을 여기에 옮겨 쓰면 이러하다.
사망 통고서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友人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伏望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방만자放漫者,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放縱者, 소위 오방五放을 제창하면서도 명실이 부합한 가면극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사世事에 관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할 것을 각오하므로 십자가 상의 구주 예수만 신뢰하고 범사에 예수의 교훈으로 생활할 맹약을 세우고 생사 간에 예수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사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이외다. 가족적 항렬에나 윤리적 예의에나 사회적 규범에나 제외자요 출척자黜陟者요 폐기자라, 인간 사회에 무용의 일종 폐물이오니 지금 이후로는 사망자로 인증하시고 일체 관계와 통신을 단절하여 주심을 통고하나이다.
소화 십육년 일월.
오방五放최흥종 근고謹告
다 읽고 난 나는,
“그런데 이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광주에 있는 목사라는데 괴짜야.”
“괴짜는 분명히 괴짠데, 거 존경할 만한 훌륭한 괴짤세그려.”
“훌륭? 그러나 난 그런 인간 사회의 이단자는 찬성 못 하겠는걸.”
“그야 물론 천하 사람이 다 이 사람처럼 염세적이 돼서는 야단이겠지만, 윤리적으로 타락의 극을 정呈하여 자기 파괴와 자기 상실을 허다히 발견케 되는 오늘임에, 만에 한 사람 아니 천에 한 사람쯤은 이런 유類의 진실된 이단자가 출현해서 외쳐 주는 것도 인생에의 한 경종일지 몰라.”
“물론 나도 처음 이 광고문을 읽고 나 자신을 도덕이라는 시험관 속에 넣어서 흔들어 보니 역시 나도 도덕적으로는 사망자의 한 사람이기에 얼굴이 붉어졌네만, 이 최씨가 연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앓지도 않으면서 입원해서 성욕을 금하기 위해 수술을 받고 고환을 빼버렸다는 말을 듣고 인생의 낙제자라 인정했네.”
“왜?”
“왜도 있나? 성욕을 발할 수 있는 것을 참아서 이기는 것이 승리요 금욕이지, 이건 근본적으로 성욕이 발하지 못하도록 고환을 빼버려서 성욕을 발할 아무 기능도 없는 불구자로서 승리는 무슨 놈의 승리야.”
“그 말엔 나의 찬의贊意를 아끼지 않네만, 그리 해서까지라도 보다 더 맑게 깨끗하게 진실되게 거룩하게 살아 보겠다는 그의 내심의 도덕적 투쟁과 불구자가 되면서까지 지결 지순 지성의 인격 파지자把持者가 되겠다는 그 동기, 그 노력, 그 용단만은 가히 살 만하잖아? 물론 죄악 밖에서 죄악을 이겼다는 것과 죄악 속에서 죄악을 이겼다는 것은 다를 것일세. 죄악을 행할 자극이 내 육체에 침범하는 속에서, 그리고 죄악에 침윤될 수밖에 없는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살면서 그것에 물들지 않고 빠지지 않도록 자기를 지켜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 그리고 그 죄악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승리라고 보네만…….”
나는 이러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나 자신이 또한 한 사망자에 불과하다는 뚜렷한 사실 앞에서 수치감을 갖고 입 끝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이론을 더 연장시킬 용기를 잃고 말았다.
박계주 ----------------------------------------
박계주님[ 朴啓周,1913 ~ 1966 ]은 간도間島용정龍井출생이며 소설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서운曙雲이다. 장편『순애보殉愛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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