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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겨울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그림 속의 나그네 - 김효자

신아미디어 2013. 1. 25. 09:10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가슴을 활활 불태우던 진실한 언어들도 일단 입밖에 나면 싸늘하게 식고 그 진실도 순식간에 퇴색해 버리는 것을 이 화가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의 나그네

 

   지난봄 일본인 화가로부터 그림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다섯 살짜리부터 보는 책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제 어린이가 없는 우리 집에서는 내가 이 책을 즐겨 보고 있다.
   막연히 먼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설렐 때, 그리고 까닭없이 사방이 닫힌 것 같고 숨이 막히는 듯할 때, 서성거리던 손에 쉽게 잡히는 것이 이 그림책이다.
   잔물살 짓고 있는 먼 바다를 노저어 온 한 나그네가 유럽 대륙 서쪽 끝으로 튀어나온 산기슭 해안에 닿는 장면부터 이 그림책은 시작된다. 배에서 내린 회색 고깔 모자의 나그네는 목초 우거진 벌판 속으로 난 하얀 길을 이만큼 걸어 와서 수사슴이 멀찍이 바라보는 데서 한 농부로부터 말 한 필을 산다. 빈 몸으로 이 말을 타고 이제부터 유럽을 두루 도는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는 짐승들도 사람들도 일체 말을 하지 않는다. 남의 마음을 할퀴는 말, 자기를 과시하는 말, 흥정하는 말, 속이는 말, 뜻도 없는 지루한 말들은 지체 없이 다 버리고, 이 그림의 주인공들은 내가 좋아하는 인정어리고 소박하고 진실한 말만 골라서 몸짓으로 표현한다.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가슴을 활활 불태우던 진실한 언어들도 일단 입밖에 나면 싸늘하게 식고 그 진실도 순식간에 퇴색해 버리는 것을 이 화가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림 속의 인물들의 이와 같은 무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나그네는 성문을 지나 고풍한 마을로 들어온다.
   마을의 시계탑이 오후 4시 50분을 가리키고 유리창 너머 경대 앞에서 치장하는 아가씨는 5시에 연인과 만날 약속이 있어 조급한 모양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 건너 저 멀리 잔디밭에서는 세 어린이가 고리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고리를 거는 표적대는 개천 이쪽에 십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교회당의 뾰족탑 꼭대기에 세워진 피뢰침이다. 그 피뢰침에는 이미 세 개의 고리가 걸려 있고 잘못 던진 한 개의 고리가 지붕을 타고 미끄러져내려가 바로 아이들 발아래 떨어지려 하고 있다.
   거리의 광장 한복판에는 10미터도 더 되는 높은 대가 있고 그 위에 영웅英雄의 대리석상이 세워졌다.
   그런데 한 마부가 이 영웅이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천연스럽게 큰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원근遠近과 고저高低의 거리 관념에서 사람이 일단 해방되고 보면, 이런 세계에서는 대리석에 갇혀 있던 옛 영웅도 준마駿馬도 다시 살아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중세中世와 현대現代가 간격 없이 공존하고 있는 유럽의 고도古都를 이렇게 표현할밖에 달리 또 모슨 도리가 있었을까.
   여기에서는 옛것과 새것의 구별이 없고, 따라서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한계도 모호해져 버린다. 상식적인 관념의 올가미들을 톡톡 끊어 버리는 화가의 상상력에 나도 어린애들처럼 통쾌한 해방을 맛본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림의 어린이들이 놓친 빨간 풍선을 따라 책장을 넘겨서 풍찻간이 있는 마을에 온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바람에 낡은 풍차가 끼익끼이익 하면서 돌아가기 시작하고 긴 창을 옆구리에 낀 돈키호테가 그 풍차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다. 충실한 판초도 그 말 뒤를 쫓아서 뛰어온다.
   이런 풍경에는 아랑곳없이 한쪽에서는 ‘밀레’의 여인들이 부지런히 이삭을 줍고 ‘쇠라’의 신사는 양산 받친 드레스의 숙녀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다.
   이사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며, 빵을 굽고, 닭 모이를 주는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안데르센과 톨스토이가 얼굴을 내밀고 고흐와 밀레와 쇠라의 화폭이 살아 움직인다. 이것들이 생활의 고달픔을 다 중화시키고, 런던 타워에서 밧줄을 타고 탈옥하고 있는 죄수의 모습까지도 시화詩化해 버리고 만다.
   마침내 나그네는 밀레의 농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들판까지 와서 말을 그곳에 남겨둔 채 언덕을 넘어 어디론지 떠나가 버린다. 저녁놀 비낀 하늘에는 비둘기가 무리지어 날고 만종晩鍾소리도 은은하게 들려온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나그네는 떠나고 나는 다시 일상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방 유리창 너머로 노을 비낀 하늘이 펼쳐지고 귀여운 까치들이 깍깍 나뭇가지를 날며 지저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나의 현실의 한 부분이요, 부단히 갈구하는 자유를 가두는 울타리에 불과하다. 뛰어넘어도 뛰어넘어도 새롭게 쳐져 있는 생활의 울타리……. 그림 속의 나그네처럼, 시공時空의 제한을 넘어 나도 한번 훌쩍 날아오르고 싶다.

 


김효자  ---------------------------------------
김효자님(1932 ~ )은 수필가이며, 1972년『수필문학』에「서울의 시詩」를 발표하면서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다.『수필문학』의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수필집『그림 속의 나그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