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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여름호, 신작수필20인선] 육이오가 짓밟은 우정과 사랑 - 이봉재

신아미디어 2012. 9. 12. 15:45

이봉재님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육이오가 짓밟은 우정과 사랑


   인민군 전과戰果를 알리는 광고판이 너덜거렸다. 남진南進화살표
가 며칠째 그대로인 낙동강 전선의 그림이 약간 퇴색해 있다. 그 옆
에는 부산 앞바다에 발을 담그고 앉아 현해탄을 향해 망연자실해 있
는 이승만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 바람에 팔랑인다. 그림 한귀퉁이
에 ‘일본에 도망할 궁리를 하는 역적 이승만’ 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민주학생연맹(민학련)원이 그린 홍보물들이어서 그 앞에 잠시 발
길을 멈추었다. 그때 느닷없이 살기가 등등한 민학련 소속 S군이 불
쑥 나타나 째려보는 통에 가슴이 철렁했다. 문예반원이었다고 해서
몇 차례 호출을 당했으나 불응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바람 좀 쐬
려고 슬그머니 외출했는데 용케 걸려들었다. 으슥한 학교 기숙사 뒤
로 끌고 가더니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야, 너 왜 우리 통일혁명과업에 협조하지 않냐. 응? 죽고 싶어? 인
민군이 불리하단 소문을 들었지? 그렇지 응?”
   한참 동안 협박을 당하느라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   미국 놈들이 반격해올지 모른다는 말이 있어. 전세가 불리한 모양
이더라. 너도 알고 있지?”
   우정을 베푸는 척하며 은근슬쩍 내 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아∼니.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듣지도 못 했어.”
   “뭐야? 그럼 피하는 이유가 뭐냐? 당장 나와서 협조하지 않으면 가
만두지 않겠어. 짜∼식. 각오해.”
   일갈하고는 자리를 떴다.
   S군이 걸어가는 쪽 기숙사 모퉁이를 힐끗 보니 악명 높은 연맹원
하나가 엿듣고 있다가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항상 권총을 휴대하였
고 반동을 색출한다며 만행을 일삼는 소문난 애꾸눈이었다. 이 자로
하여금 엿듣게 해놓고 내 속마음을 떠보는 S군의 음흉한 계략에 치
가 떨렸다.
   반동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는 공포의 치하였고 인적 드문 산골짜
기에는 이름 모를 시신이 아무렇지 않게 버려져 있던 때였다. 그들의
통일과업에 협조하지 않는 짝꿍 친구를 반동으로 잡아 넣으려는 수
작에 넘어가 미군이 반격해 올지 모른다는 눈치를 보이기라도 했으
면 어떻게 됐을까? 우정을 짓밟은 인면수심에 의해 산골짜기의 고혼
이 되었을지 모른다.
   와락 소름이 끼치며 위기감이 들어 멀리 도망쳐 숨어버렸다.
   엿듣던 자는 여순반란사건 때 내게 폭행을 가한 바도 있는 애꾸눈
이어서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손들어. 손들어.”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깜짝 놀랐다. 일본도를
치켜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험상궂은 머슴애 앞으로 정신없이 뛰
어갔다.
   “이 새끼야. 손들라고 했지 누가 뛰어오라고 했어 엉?”
   무턱대고 칼자루로 내 어깨를 후려쳤다. 그리고 소지품을 뒤졌다.
   “꺼져버려 이 새끼야.”
   후∼ 살았다 싶어 그 자리를 모면했는데 그자가 바로 애꾸눈이었
다. 그 애꾸눈이 인민군 남침으로 형무소에서 풀려나자 또 날뛰고 있
는 것이었다. S군은 통일 과업에 협조하지 않는 데에만 앙심을 품은
엘리트였지만, 애꾸눈은 여순반란 사건 때의 원한에 대한 복수의 화
신이 되어 있는 마구잡이였으므로 중학교의 연극제 때 비록 연극이
라고는 하지만 여순 사건을 규탄했던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얼마
나 다행인지 몰랐다.
   여순 반란사건 당시 순천에는 세인의 존경을 받던 손양원 목사가
있었다. 이분은 반란 때 두 아들을 살해한 아들 친구를 백방으로 노
력해서 사형을 면제케 해주었을 뿐 아니라 원수를 양아들로 삼은 사
랑의 원자탄이었다. 그래서《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의 주인공이 되
기도 했는데 이를 주제로 하는 연극에 내가 재판장으로 출연하여 아
들들을 죽인 학생을 살려달라는 눈물 어린 청원을 받아들였다. 죄인
의 방면을 선고하면서 비인도적 폭동과 만행을 도도히 규탄하였고
손 목사의 사랑을 찬송가로 피력했다.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연기가 아니고 감격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며 찬송가를 불렀기에
연극을 관람하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학부모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더욱 슬펐던 것은 육이오 전쟁으로 공산당 치하가 되자 사랑을 짓밟
은 자들의 손에 의해 손 목사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해방 후의 좌우대립과 육이오 남침은 이처럼 이념과 사상의 이름
으로 우정과 사랑을 배신하였고, 복수심에 불탄 반인륜적인 행위로
이 민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런 비극은 목적이 결코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는 사리事理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봉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