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날개.. 이것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새삼 느껴봅니다.
옷이 날개
우리나라 사람은 셋만 모이면 친목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과천
연수원에서 2개월간 합숙교육으로 한가족처럼 된 진급 동기들이 모
임을 만든 건 자연스런 순서였다. 이제까지 수차례 진급을 하는 동
안 소속 기관장 발령장 하나로도 감지덕지했으나, 이번에는 주먹만
한 국새가 찍히는 대통령 발령장을 받는다고 했다. 소위 엘리트들이
이십대에서 성취하는 직위를 나이 사십이 넘어 얻게 되는 일이니 그
렇게 자랑할 일도 못 되건만 우리는 철부지들처럼 들떠 있었다. 교
육이 끝나고 전국 각지로 배속받은 동기들은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
쉬워 매년 한 차례씩 지역을 번갈아 가며 모임을 갖기로 하고 흩어
졌다. 대구에 있는 국립기관으로 내려간 나는 서울, 부산, 춘천 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여 서울 소식도 듣고 우의를 다지는 기회
로 삼았다.
3년 뒤 내가 다시 서울로 복귀했을 때 일이다. 그 다음 모임 장소
인 제주도는 특별한 곳이라 부부동반 여행을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
다.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걱정하는 아내에게 모임 안내장을 보여
주었다.
‘복장 : 간편한 차림’
이 얼마나 마음 가볍게 만드는 말인가. 우리 부부도 모임 취지를 존
중(?)하여 그야말로 간소하고 편한 차림으로 여행에 나섰다. 아내는
티셔츠에 청바지, 거기에다 발이 편하라고 헌 운동화까지 신었다. 하
지만 웬걸, 정작 이십여 쌍의 부부는 패션쇼에 나온 사람들처럼 요란
했다. 박봉의 우리가 멋을 부려봐야 오십보백보일 테지만 그 중 한
녀석이 유달리도 튀는 옷을 입은 모양이 눈에 띄었다. 모임의 총무를
맡은 그는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이번 여행의 안내장을 만
든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내는 그의 양복이 최고급 브랜드라고 귀띔
했다. 나야 누가 무슨 옷을 입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아내가 옷 때문
에 여행의 흥을 잃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렇잖아도 중앙 부처에 근무
한다고 우월감을 갖고 있는 녀석들과 그 부인네들에게 주눅 들지 않
을까 걱정되던 차였다.
“짜슥이 좀 오버하나 봐!”
이런 말로 아내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 낯가림이 많은 아
내였지만 그날따라 옷에 개의치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있는 일
이 천만다행이었다.
여행의 일정이 깊어질수록 녀석이 옷차림에 신경 쓴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전세버스 앞자리를 지키고 가다가 주변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쏜살같이 뛰어나가 일을 수습했다. 옷이 날개인 세상이니 꾀
죄죄한 옷을 입고 나가면 될 일도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아닌가.
성수기 몰려든 인파에도 차질 없는 진행으로 2박 3일 동안 다양하고
알찬 여행을 하게 된 것이 모두 그의 숨은 노력 덕분이라는 데 이의
를 가질 사람이 없었다. 자청한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불편한 옷을
입고 나온 그를 폄하한 말이 쑥스러워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귓속
말로 한 마디 덧붙였다.
“옷 잘 입은 녀석이 일도 잘하네!”
퇴직을 한 요즘,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한 달에 한 번 문우들의 모
임에 나간다. 매사가 까다롭던 공직을 벗어버렸으니, 그 자유를 만끽
하기라도 하듯, 집에서 입던 옷을 먼지만 털고 나가는 형편이다. 사
실 입을 옷이 없는 나는 ‘글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옷이 대수인
가.’라는 이유를 붙이고 편한 마음으로 문우들을 만난다.
하루는 모임 후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으로 전에 없이 양복과 넥타
이를 매고 나갔다. 모임을 리드하는 한 여성 문우가 그렇게 산뜻하게
입고 나오니 보기가 좋다고 했다. 평소 내 차림이 좀 딱했던 모양이
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느낀 까닭은 그 다음 말
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옷을 가려 입는 일은 자기만을 위함
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행위라고 했다. 옛날 제주도에
서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며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내
가 혼주婚主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 정장을 하고 나온 이유도 그녀
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옷이 날개가 아닌가. 회원들
이 기품 있는 옷을 입는 것도 모임의 격을 높이는 일에 일조하는 일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항상 단정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 옷만 잘 입
는 것이 아니라 글도 잘 쓰고 있으니 ‘옷 잘 입는 사람이 글도 잘 쓴
다.’란 말을 붙여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최근에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참으로 놀랄 얼굴이 뉴스에 나왔
다. 그 옛날 제주도 여행에서 옷을 잘 입었던 그 사람이었다. 이제 불
과 15년이 흘렀을 뿐인데, 더 이상 농담으로라도 ‘그 녀석’ 이라고 해
선 안 될 기사였다. 너무도 뜻밖이라 아내를 불렀다.
“이 사진 좀 봐!”
“○○○씨, ○○대학 총장에 취임…….”
아내도 입이 벌어졌다. 사진 중앙 이사장 옆에 자신감 넘치는 얼굴
로 앉은 분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대학 총장이 어떤 지위인가. 권
력이나 돈으로 넘볼 수 있는 자리인가. 지금은 낙하산 인사를 하던
옛날과는 다르다. 지방 사립대학이야말로 능력 있는 총장이 아니면
존립하기 어려운 세상이니, 평소 범상치 아니한 그의 행보를 눈여겨
본 대학 이사장이 그를 적임자로 지목했음이 분명했다.
그 기사에는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총장으로 취임하기까지 남
달리 노력해온 그의 성실함과 됨됨이가 적혀 있었다. 다른 진급 동기
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를 멈추지 아니한
그의 발자취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설마 옷이 총장을 만들기야 했을까마는, 작은 일에도 남을 배려하
는 마음, 옷 하나 입는 데도 남에게 봉사하는 마음, 그 작은 마음들이
모이고 쌓여 오늘의 그가 되었으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옛날 제주 모임에서, 주변 사람을 위해 불편을 무릅쓰고 정장을 하
고 나왔던 그의 어깨에서는, 그때 이미 먼 창공을 비상할 ‘날개’의 깃
털이 자라고 있었으리라.
남명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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