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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여름호, 신작수필20인선] 독서지미고讀書志彌高 - 김한석

신아미디어 2012. 8. 30. 16:55

"책을 읽으면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높일 수 있다" 항상 듣는 이야기이면서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면서도 언제나 게을러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다시 힘을 내보렵니다.   김한석님, 감사합니다.

 

 

 

 

  독서지미고讀書志彌高

 

   사무용 큰 봉투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두터운 붓글씨로 씌어 있
는 내 이름, 왠지 느낌이 이상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뒷면을 보니 발송인이 두어 달 전 세상을 뜬 친구의 이름이 아닌가.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반가우면서도 사자死者가 보낸 물건이라 뭔가 께
름칙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니 나의 등단登壇을 축하하는 액자용 붓
글씨가 담겨 있었다. 등단한 지도 한참 되었으니 오래전에 써놓은 것
이 분명한데 대체 언제 부친 것일까. 그 친구, 한량이었으니 생전처
럼 팔도강산을 누비며 다니다 목을 축이려 내 집을 찾은 것일까.
   영문을 몰라 친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삼십 년 가까
이 서예공부를 해왔는데 그 학원에서 사물함을 정리하다 주소가 적
힌 밀봉된 봉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부쳐버렸다나.
   그는 평소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술자리에 어울
렸고 돈도 잘 쓰는 데다 성격도 호탕하여 여자들이 줄줄 따랐다. 그
래서 세칭 장안의 한량閑良이라 했다. 원래 그 친구는 서울 한복판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래등 같은 집을 지니고 있었으나 밤낮 친
구 뒤치다꺼리하느라 가산을 돌보지 않아 살던 집을 팔고 말았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부인도 더는 남편의 하는 일을 방관하고 있
을 수 없었다. 부인은 이해가 깊은 분이라, 남편이 술 마시는 그 자체
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
다. 당장 이사를 가야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막연했으나 어떻게든
남편이 착실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이라 나도 그 친구 못지않게 술을 좋아했다. 두주불사斗酒
不辭라 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선친 밑에서 배운 술이라 과음을 한다
거나 몸을 못 가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자리에 오래 눌러앉아
있거나 이삼차로 이어지는 일도 좀처럼 없었으니 술꾼들의 눈에는
매력 없는 사내로 비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술 기분은 누구에게도 못
지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뜻밖에 내 이웃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신판 맹모
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랄까.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부인은 나를 아주
모범적인 친구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 잘못 짚었다는 생각에 나
는 황당했다.
   환경의 변화는 진정 사람의 행태를 바뀌게 하는 걸까. 여하튼 그 친
구는 내 이웃에 이사 온 후로 술을 삼가고 일찍 귀가하는 버릇이 생
겼다. 집에 들어올 땐 술 취한 모습 대신 웃는 얼굴로 아이에게 과자
를 내밀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인은 참 좋아했고 모처럼 웃
음이 난다고 했다. 귀가하여 술을 마시고 싶을 땐 나를 찾았고, 우리
집사람이 하는 약국에도 자주 들러 약사 보조원 노릇을 자임하기도
했다. 손님들에게 수다도 떨고 집사람과도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만 이웃하고 있는 동안 두 부부는 매
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호인이요, 사교적인 친구였건만 남에게 베풀었던 것에 비
해 조금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돈 뿌리고 다닐 때는 그림자처럼 붙
어 다니며 희희낙락거리던 사람들도 돈 떨어지니 거의 그 곁을 떠났
다. 그래도 그들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돈에 별 욕심
없던 그는 있으면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분수를 좇아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탐욕이 없다 보니 세속적인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들이야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 나
름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살다 간 사람이었음을 확신한다.
   가끔 그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자네가 더 유명해지기 전에 글 한
점 받아 두어야겠다.”고 하면“내가 무슨……”하면서 말끝을 흐리곤
했다. 겸손함이었다. 그렇게 조를 때는 인색했던 그가 왜 지금에야
글을 내놓는 것일까. 단순히 등단을 축하하는 인사치레만은 아닐 것
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
   그가 써 보낸 글은 讀書志彌高(독서지미고).
   ‘책을 읽으면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글귀였
다. 등단에 머물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라는 충언
이리라. 평소에도 더러 듣던 교훈이긴 하나 영혼으로부터의 당부이
기에 나에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절실한 과제
를 짚어준 친구!
   고맙다 친구야!

 

 

김한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