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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여름호, 신작수필20인선] 달빛 초상 - 이남희

신아미디어 2012. 8. 21. 19:41

이남희님의 신작수필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달빛에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보아야겠습니다.

 

 

 

  달빛초상


   겨울 산행길이다. 앞에 가던 어르신이 삐끗 넘어지려는 것을 반사
적으로 붙들어 드린다. 엉겁결에 잡은 손길이 따숩다. 연세가 아버지
뻘은 되어 보인다. 세상에 나와서 제일 먼저 배우게 된 말이자, 내 몸
의 뼈가 된 말을 의식적으로 떠올린다. 나를 세상에 바로 서게 하고,
살면서 내가 부르고 따르던 호칭이었으나 나는 그 말을 이제 영영 부
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 엄마 제사를 남동생에게 넘긴 지 몇 해가 되었다. 그 뒤로
기일을 챙기지 못했다. 내 아픈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쁘다는 게 핑
계였다. 내 사는 형편이야 어찌되든 간에 밤하늘에는 여전히 흐벅지
게 달이 떴다가 이울어져 갔다. 그 달빛에 가끔씩 마음이 술렁였고
가끔 하늘을 우러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어른거렸
고 두 아들 혼사를 남겨두고 떠나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슴푸레
보였다.
   나와 살 부딪긴 인연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화석처럼 엉겨진 기억
들이 밤바람에 차갑다. 열 살 때 양친을 잃은 아버지, 동지섣달 매운
바람 속에서 엄마의 그림자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얼얼하게 육신
을 파고든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올 때면 문득문득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나는 어린 소년의 시린 손을 더듬곤 한다. 겨울날, 장지문
고리 세차게 흔드는 바람을 따라 나선 열 살배기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엄마 엄마’불렀다는 회상이 개울가에 파사하게 살얼음을 피운
다. 그해 겨울 달빛은, 소년에게 얼굴도 가물가물했던 어미의 초상이
되어갔던 것이다. 한올지던 기억들이 얼어붙은 빨래처럼 내 눈앞에
서걱대고, 차가운 달빛은 대를 이어 나의 초상이 되어가고 있다.
   초승달을 따라서 선을 긋다가 반달로 엄마의 하관을 완성한다. 미
소가 고왔던 엄마의 모습이다. 처녀 시절 어스럼진 개울가에서 보리
쌀 씻던 손끝이 확대된다. 개울물에 옷고름 빠칠세라 안섶에 고름을
끼워넣는 처자의 눈빛이 함지박에 고인다. 단발머리의 갸름한 얼굴
이 개울물에 어룽진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총각이 보인다. 그는 처자 얼굴을 한번
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었다. 형수를 졸라서 천신만고 끝에 그녀의 졸
업사진을 손에 넣었지만 파리똥만 한 얼굴로는 당최 생김새를 종잡
을 수 없었기에 겁 없이 처자의 마을로 정탐을 나선 것이다. 집 거위
떼가 그녀를 호위하듯 따라 나왔다. 거위들이 총각의 낌새를 눈치 챘
는지 정자나무 쪽을 향해 꾸웩꾸웩 소리를 내는 통에 정자의 기둥에
붙어선 총각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점차 어스름이 점점 깊어져 가는
데 처자는 좀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서 마지막
다릿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 되었다. 다급해진 총각은 개울 건너 대
숲 쪽에다 냅다 돌을 던지며 소란을 피우는 꾀를 내었다. 용케도 처
자가 놀라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얼굴의 윤곽선과 뒤태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빛은 희었고, 얌전한 눈매가
얼른 눈에 들어왔다. 영산포 읍내의 처자들과는 품새가 달랐다는 게
훗날 아버지가 전한 말이다.
   그 후, 형수가 정식으로 처자 쪽에 혼담을 넣었지만 총각의 환경이
마뜩찮은 그녀의 집에서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총각 인상이나 한번
보아달라고 어렵사리 청을 다시 넣었고, 처자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장날에 총각 얼굴이나 한번 봄세, 약조를 하고 말았다. 약속된 장날,
장에 간 처자 아비는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된 처자 어미는 재 너머 쪽에 하냥 눈길을 두고 있었다. 이윽고 두루
마기 휘적거리며 걸어오는 낭군 모습이 바윗고개로 보였다.
   “오늘 겁나 늦었소 잉. 총각은 만나봤소? 그랬네. 어쩝뎌? 코랑 눈
이랑은 빤드시 제자리에 붙어 있습뎌? 형제간은 몇이나 되고라우? ”
처자 어미는 찹찹하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얼굴은 빠진 편은 아닌
데, 귄도 있고 눈빛도 총총하고,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모름지기 눈
에 총기가 있어야 안 한가, 조실부모하고 형 밑에 산다고 하는 것이
쬐간 맘에 걸리기는 하네만 제 발등에 불은 끄고 살겄데. 약주 한 잔
걸치고 느긋이 오신 것을 보아하니 그다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결
국 처자는 영산포 총각과 청실홍실 연분을 엮게 되었다.


   겨울 산행 내내 밖으로 내쉬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동안거에 들어선 나목 사이로 어둠이 빠르게 내려왔다.
하산 길에 돌부리에 채여 엎어지면서 몸의 중심을 잃고 말았다. 부
지불식간에 ‘아부지. 엄마…….’가 비명처럼 튀어나오고 말았다. 산
중에 계신 아부지, 엄마를 산중에서 찾은 셈이다.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담아 두었던 말을 제대로 써 먹은 셈이다. 얼얼한 손바닥으로
엉덩이와 무릎뼈의 통증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 소리가 메아리 되어
왔다. 쓸쓸하게도 그 소리는 내 몸이 놀라거나, 아파서 운신하기 어
려울 때 구원의 후렴구 외에는 별로 사용치 않는 단어임에도 불구하
고 끊임없이 입안에 고이는 묵언이다. ‘아부지. 엄마…….’ 혼잣말이
된 이 말은 욀수록 속절없이 그립고 사무치는 말이 되었다. 인연의
끈은 이렇게 간격 없이 메아리 되고 윤회하면서 단단히 동여지는가
보다.


   뿌옇던 반달이 또렷해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된다. 딴
세상으로 바삐 가신 두 분, 나란히 저 달 속에서 못다 한 연분을 이으
려는지 숨은 반쪽을 찾으려는지 희끔한 반달이 자꾸만 한쪽으로 몸
을 기운다.

 

 

이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