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비가 오는데 이제는 너무 많이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이고운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몸을 맡겨보시죠.
물의 느낌
등이 물에 닿는다. 물이 등을 만진다. 청진기는 내 귀에다 꽂아주고
등 안쪽의 소리는 물이 듣는다. 뼈를 점검한다. 아! 오래전에 나무 등걸
메고 산을 내려오다 짓눌렸던 척추, 4번과 5번 사이를 삐져나오려는 물
렁뼈를 주무르며 진찰을 시작한다. 찟, 신호가 온다. 내 척추의 역사.
물이 보고서를 타전한다. 회신이 오는가. 이상하다. 추울렁 쿠울렁 바위
가 우는 느낌이다. 그 울음이 내 등판에 물타자를 친다. 톡, 톡톡, 아주
노련한 독수리 타법이다. 청진기에 웅성거림이 있다. 오래전에 내가 잊
은 고어 같다.
척수에 저장되었다가 기억을 잃어버린 입자들, 그 세세한 그림들을
물거울로 비추어 본다. 거울을 포개고 각도를 이리저리 맞추어 본다.
아무래도 내 등뼈는 지나치게 단단한가 보다. 두드리는 물의 타자가 현
대문으로 성형되지 않는다.
파도가 와서 거든다. 좌에서 우에서, 제 맘대로 흔든다. 눈꺼풀을 덮었
으나 눈은 잠들지 않았다. 점점 물속이 환해진다. 포식성이 강한 물방개
가 잠수타기 놀이를 하고 있다. 어서 잠들라고 주인이 소등을 하였으나,
파도가 굼틀굼틀 내 등짝을 들었다 놨다 잠을 뭉갠다. 심술을 놓는가,
깨어있으라는 듯이. 뒤척이며 안간힘을 쓴다. 뭉친 내 근육을 풀어주려
고 딴엔 안마를 하는 모양이다. 엷은 간지럼을 태운다. 그러다가 사정없
이 주먹질로 팬다.
점점, 좀 심하다. 왜 이러는지, 파도가 이토록 내게 애달파하는 이유
가 뭘까? 물밑으로 생각을 깊이 밀어 넣는다. 울렁거린다. 좌우전후로
진자가 커지면서 높낮은 물봉우리를 오고 간다. 참다못한 돌미역들이
물밑을 많이 흔드는가 보다. ‘팩’하는 해초의 효험을 느껴보려고 눈을
감아본다.
파도가 또 잠을 쫓는다. 눈초롱 안으로 저만큼 고래등이 보인다. 푸우
물을 뿜으면서 굼실굼실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검은 파도가 길길이
날뛰며 밀려온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새우 떼 멸치 떼가 모였다 흩어졌
다, 투망 치는 모양 무늬를 그린다. 그것도 진정효과가 있긴 있나보다.
의식의 마지막 지점을 넘어서려는데 등 밑에 달린 회전날개에 뭐가
걸리는 느낌이다. 대마도일까? 암초일까? 파도와 물이 서로 갈등하는
것으로 봐서 대한해협을 건너나 보다. 애무가 불규칙해진다. 수심이 얕
다지만 늘 역사의 파고가 높았던 곳. 뜨거운 물이 밀려오다 차가운 물이
밀려오다 한다. 왜인에게, 왜바람에 신들린 수길에게, 수도 없이 깨어졌
을 대한 해협의 파도들이 이렇게 내 척추의 순도를 점검하는 연유를 짚
어본다.
겁먹지 말자고 탕에서 출렁이는 물속에 미리 등을 담그고 나오지 않
았는가. 신경을 진정시키느라 마른 오징어를 씹었고, 술로 목을 헹구고
과자부스러기들로 이빨을 깨물지 않았는가. 하지만 메스껍다. 물은 척
추를 만지고 어르는데 파도는 등을 두드리고 몸을 흔든다. 울렁일 때마
다 머리가 어지럽다. 목에 쥐가 난다. 등으로 받는 애무, 등으로 느끼는
오르가슴이 좀 심하다. 울컥울컥 입으로 쓴것이 올라온다. 찬바람을 쐬
면 좀 가라앉을까 선상으로 나온다. 그때의 바다다. 절망을 겹겹이 칠
했던 바다, 지난 역사를 다 쓰려고 밤새워 먹을 가는 맷돌이 돌고 있는
가? 검은 낯빛을 번질거리는 파도 골짜기에 소주 한잔 뿌려 잠시 읍을
올린다.
다시 등이 물을 맞는다. 척추를 어루만지는 잔잔한 손길을 타고 역사
의 소리들이 청진기로 몰려와 들끓는다. 고국을 돌아보며 바다를 건넜
을 귀와 코, 그 베어짐의 귀성鬼聲들이 지금도 이렇게 내게 수전파로 오
고 있다. 마지막 왕실의 옹주를 위로하는 최 어른의 손길에서 나오는
소리도 나의 애를 끊나니. 슬프게 빼면 더 슬프게, 기쁘게 빼면 기쁨으로
나오는 은의 소리, 오늘 이 밤바다를 슬프게 은을 빼면서 지나간다. 젊었
던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부지런히 어머니를 향해 물결을 탄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어느 바위에 앉아 머리 빗는 인어의 애절한 노래
가 수중음으로 울린다. 해저에서 파도를 부수며 수도 없이 건너오는 소
리, 소리들. 옛, 그 어느 날 내 척수의 원조들이 이렇게 살아남아서, 대륙
붕의 바다를 건너는 등을 아프게 안마한다.
물은 흐른다. 어디를 가나 흐르는 물은 있다.
‘관부연락선’에 흐르던 물, 그 회한을 파도 타는 대한해협의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부관훼리호’로 바뀌었다. 아늑한 삼등선실에 등에 닿
는 물의 느낌. 그냥 흘러온 물이 아니다. 깜깜한 서녘 수평선으로 기우는
조각달을 안주 삼아 강소주 한 잔 입에 탁 털어 넣는 느낌 같은…….
이고운 -----------------------------------------------------------------------
2004년 ≪월간문학≫, ≪계간수필≫ 등단.
수필집: ≪백번째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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