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부르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요, 친구, 술, 군대, 부모님, 선생님.. 여기에 수필이 들어가면 추억이 더욱 풍성하고 감미롭지 않을까요.
담배, 추억을 부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다. 기사가 버스를 워밍업시키고 있다. 출발 시간
이 다 되었는데 손님 한 분이 시계를 보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시내에서
제일 큰 극장과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분이다. 무슨 다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안색부터 살핀다.
담배 한 대를 급히 빼어 물더니 불을 붙인다. 그리고는 묻는다.
“출발시간이 4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죠?”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예상 밖의 질문에 그만 피식하
고 웃음이 터진다. 순식간에 담배 한 개비가 빨갛게 충혈되어 회색빛
재로 변해간다.
“시간이 좀 남았으면 몇 모금 더 피워도 되겠지요?”
담배를 쉬이 내려놓지 못하고 동의를 구한다. 시간이 2분여 더 남아있
다. 그 금쪽같은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을 저버릴 수는 없다.
“아! 네, 시간이 남았네요. 더 많이 피우십시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담배를 마저 피우도록 말미를 준다.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거짓말을 하고 차에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다고 그가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 내가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었다고 고맙게 여기지는 않
을 것이다.
이십여 년이 더 지난 일이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기침이 잦고 가끔 피가 섞여 나와 검진을 받은 것인데 폐암이
선고 되었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버지에게는 말씀 드리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병실에 들어섰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
았다. 화장실에 가셨거니 하고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병실 복도를
살펴보고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아도 안 계셨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보니 그곳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뜻밖에 아버지가 거기 계셨다.
아버지는 기침을 해 대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보시자 당황
한 빛이 역력했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의 마음을 몰
라주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담배가 해롭다고 그만큼 피우지 말라고 하는데 왜 피우셨
어요?”
짜증과 체념이 섞인 푸념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얼마 후 아버지는 퇴원을 하셨다. 병원에서 더 손 쓸 방법이 없어 후일
을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눈에 띄
지 않았다. 담배를 끊으셨는지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몇 개
월 사시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소견과는 달리 건강하게 5년을 더 사시고
떠나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느라 서랍장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그 속
에 담배와 라이터가 단정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식구들
모르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왈
칵 눈물이 쏟아졌다. 살아 봐야 얼마를 더 사신다고 그렇게 간절하던
담배를 자식이라는 미명으로 막았던 것이 죄송스럽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진정한 효는 어떤 것일까. 부모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고 싶은 것
을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도록, 잡숫고 싶은
것 다 드시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건강보다
나를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차창 밖에 풍요로운 들녘이 펼쳐지고 있다. 임고서원을 지나니 아름
다운 숲 대상에 선정된 나의 모교 임고초등학교가 보인다. 지금은 콘크
리트 건물에 전교생이 이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일제
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지어서인지 교실 밑은 방공호를 파놓은 목조건
물이었다. 재학생만도 천 명이 넘었는데 아버지가 1회, 내가 46회 졸업
생이다.
5학년 때였다. 교실 청소를 하다가 개구쟁이 녀석들이 교단을 들어내
고 방공호로 내려갔다. 그중 한 놈이 선생님 책상에 있던 담배 한 개비와
성냥을 슬쩍했다. 담배를 피우던 선생님의 흉내를 내보고 싶어서였다.
호기심에다 영웅심까지 곁들인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학급전체가 단체로 벌을 받
던 중에 선생님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용서할 테니 잘못한 행동
을 모두 적어내라고 하셨다. 한 녀석이 담배사건을 낱낱이 적어냈다.
호명된 녀석들이 줄줄이 불려 나갔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담배 한 개
비씩을 입에 물려주고 손수 불을 붙여 주셨다. 왜 피웠는지를 물으며
종아리를 치셨다. 그중 한 친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담배 안 피우면 홍석이가 사내대장부가 아니라고 해서 피웠습니다.”
그날 나는 떡이 되도록 맞았다.
담배는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백해무익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반적 상식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미국 럿커스대 E 아이들러 박사에 의하면 흡연이 어떤 사람들에
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것 때문에 건강이 나빠질 거라고 상
상한 사람들은 건강이 나빠져 일찍 죽었고, 흡연이 건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연구결과도 백 프로는 아닌 것이다.
그때 담배 피웠던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
다. 10대에 단 하루라도 니코틴에 노출되면 나중에 우울증과 비슷한 상
태가 유발된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려하던 소식이 없는 걸
보니 그 당시의 일을 흡연으로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
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언제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 거나하게
회포를 풀 수 있을까.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휘둘러본다. 추억을 부르는 데 담배만한 게 또
있을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불을 붙여본다. 정답고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담배연기 속에서 피어난다. 그렇지만 왠지 슬프다. 벌써 추억
을 먹고 살 나이가 되어간다는 것이.
지홍석 ------------------------------------------------------------------------
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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