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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수필행] 가장 귀한 선물 - 최순자

신아미디어 2012. 7. 6. 12:07

어느 순간에 가장 귀한 선물을 고르는게 어려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고, 귀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가장 귀한 선물이신지요.

 

 

 

 가장 귀한 선물


   “알아 맞춰 봐요. 당신이 아주 좋아하는 것인데.”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들었던 것을 얼른
뒤로 감추고 빙그시 웃으며 뜸을 들인다.
   국제운송업을 하는 남편은 일 년에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출장이
잦다.
   싼 티켓의 비행기로 또는 호텔비 덜고자 밤비행기를 많이 이용하면서
도 가끔은 그럴싸한 선물이 가방의 짐 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도 저도 사라지고 그저 이웃동네에 다녀온 것처럼 무심해져 버렸다.
   멀뚱하니 서 있는 나를 보자 아쉬운 듯 감추었던 누런 봉투를 내 밀었
다. 책인 줄 알았는데 해 지난 다이어리 세 권이 나왔다.
   십여 년 전, 남미 출장길에 산호세란 곳에 며칠 묵은 일이 있다. 그곳
은 파나마 운하 북쪽 태평양과 카리브 해를 끼고 꽃과 자연이 잘 어울어
진 나라, 코스타리카의 수도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아침에 일
어나 커튼을 젖히니 건너편에 대사관저 같은 큰 건물이 있고 높은 담장
위엔 만발한 붉은 꽃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꽃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갔다. 담장 아래는 종이처럼 얇은 꽃잎이 상
하지 않고 깨끗하게 떨어져 있었다. 보석을 만지듯 조심조심 손수건에
꽃잎을 주워 담았다. 호텔방으로 돌아와 가져갔던 책갈피에 한 잎씩 잘
펴서 넣고 그 위에 무거운 책으로 눌렀다. 그 해 겨울 성탄절 카드에,
아이들 생일에, 선교회원 문안편지에 꽃잎을 붙여서 띄웠다. 편지도 반
가운데 꽃잎까지 붙였다고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야! 나 아직 이렇게 예쁜 카드는 평생 처음이야.” 몸이 좀 불편한 한
선배 언니의 감동이 듬뿍 묻은 극찬에 오히려 내가 큰 선물을 받은 듯,
이로 인해 꽃 채집에 보람마저 느끼게 했다. 적도 부근이나 열대지방에
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꽃나무는 부겐빌레아(BOUGAINVILLEA-불어) 혹
은 부켄베리아라고 불리운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세 권 모두 꽃잎이 수북히 눌려져 있었다. 내 입가
에도 함박꽃이 핀다. 습기가 채 가시지 않은 꽃을 한잎 한잎 다른 책에다
옮기는데 아침에 시작한 일이 오후 늦게야 끝이 났다.
   다카(방글라데시) 사무실에서 업무를 마치고 나오는데 부겐빌레아꽃
이 마당 가득히 떨어져 있었단다. 반가운 김에 수첩을 꺼내어 주워 담는
데 직원들이 다가와 의아한 눈으로 쳐다 보았겠다. “와이프한테 선물하
려고. 이 꽃을 아주 좋아해!” 그러자 직원 서너 명이 다 쓴 다이어리를
들고 나와 꽃을 그렇게 많이 담아 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눈엔 하잘 것
없는 것을 머리가 허옇게 센 사장님이 줍고 있는 것도, 지천으로 나뒹구
는 꽃잎이 선물이 되는 것도 기이했을 것이다. 아무튼 손쉽고도 소박한
사장님의 선물작업에 일조를 하게 된 다카직원들. 조금은 신이 났었을
까? 그곳을 방문한 적 있는 나는, 어쩌면 장난기 어린 그들의 크고 검은
눈망울이 선하게 떠오른다.
   모처럼 여유있게 저녁을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불현듯 정초
에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생각이 났다. 고위공직자 내외분을 모신 자리
인데 유독 마음에 남는 대화가 있었다. “부인의 생일엔 꼭 카드를 쓰고,
나이 수만큼 장미꽃을…. 더 놀라운 일은 결혼하고 지금껏 한번도 거른
일이 없었다.”고. 세상이 다 아는 바쁜 분인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분위기가 약간 머쓱해졌다. 하지만 평소 좀
서운했던 심사가 나를 부추기기도 했고 내친김에 유치한 질문을 터뜨리
고 말았다. 혹시 내 생일에 장미꽃 한 송이라도 사들고 온 기억 있어요?
조금은 기죽을 줄 알았던 남편 “허허, 이 사람 보게. 장미만 꽃인가? 수백
송이 꽃을 안긴 지가 언젠데 그런 섭섭한 말을.” 어찌나 잽싼 응수에
할 말을 잊고 웃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잔잔한 기쁨과 살맛나게 하는 것 중에 선물만 한
게 또 있을까. 회사원으로 근무할 때는 조촐하게나마 생일도, 기념일도
챙기며 살았는데 사업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 자신의 사소한 일들에는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수출입화물이 쌓이고 우리 회사 경기도 한창 좋
을 때 느닷없이 노조가 생겼다. 연이어 IMF 환율파동 등에 대기업이 아
닌 우리회사는 쓰나미를 맞은 듯 그간의 이룬 자산과 심지어 우리가 거
처하는 아파트까지도 쓸어갔다. 그 와중에 회사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은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했다. 이 격랑의 소용돌이에서 바라볼 곳
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이었던 우리의 기도가 더욱 절절해지고 호황을 누
릴 때 방만했던 경영도 많이 정비가 되었다. 지나놓고 보니 어려움 또한
큰 자산이 되었고 힘든 고비마다 용기와 절망하지 않는 믿음은 부모님
으로부터 받은 값진 유산이요, 인생의 소중한 선물인 것을.
   하루의 출발을 격려하는 마음으로 아침마다 남편의 구두를 닦아 놓는
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이마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렵고 키도 줄고
체중도 줄어 후줄근한 모습을 대하면 지난 날 괘씸하던 정은 어디 가고
측은지심만 더해간다. 경제가 어려운 때 칠순을 넘겼어도 회사 일에 골
몰하느라 여유가 없고 정서적으로 건조하지만 그날, 송도 방파제를 찾
은 날 서먹한 채로 앞만 보고 걷는데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이
돌연 와이먼의 <은파>를 휘파람 불지 않는가.
   빈 하늘엔 달빛이 가득하고 밤 바다 위로 휘파람 소리는 파문을 그려
가는데 나는 그만 샤갈의 그림 속 신부가 되어 하늘을 둥둥 날고 있었다.
   한 송이 장미꽃은 없었지만 책 속에 수많은 꽃잎을 가져온 사람, 빛은
많이 바랬어도 그 옛날의 영국신사인 양 아직 나의 소중한 선물로 자리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오늘’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내리신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

 


최순자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