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력 부재, 나의 실수를 극복하려는 마음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경험.. 항상 어렵지만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까마귀의 변명
두 발을 곧추세웠다. 행여 주인이 담 밖의 인기척을 느낄까 봐 담 옆으
로 바짝 붙어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걸어 빠져나왔다. 주변을 벗어
나자 잰걸음으로 큰길까지 와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또’라는 말이 머리에 스치면서 혼자만 아는 의미 있는 웃음
을 웃었다. 맘에 담은 한 가지 일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일은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곤욕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 친구들의 모임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회원 친목을 위해서
새 회원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마침 남편이 외출하면서 나를 약속
장소에 내려주고 떠났다. 거리는 벌써 어둠이 깔렸다. 늦은 마음에 허겁
지겁 회원 집을 찾아 대문을 들어서서 살펴보니 이상하게 집안이 조용
했다.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살며시 다시 밖으로 나와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 날은 오늘이 아닌 내일이란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
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서 찻길을 바라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십수 년도 훌
쩍 지난 그날의 황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머리를 쿡쿡 치며 하늘을 쳐다
보니 별빛만 초롱초롱하다.
지금보다는 한참 젊은 시절 늦게 뛰어든 사회생활에 몸도 마음도 분
주했다. 그럴 즈음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다. 이론은 단박에 합격
했지만 실기에서 몇 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좀 바쁘고 급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튀어 나오는 나의 실수, 시간도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그때도
전화 통고만 받고 시험일은 문서로 확인하지 않은 채 운전면허 실기 시
험장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번호가 같은 사람과 마주했다. 수험표는
보지 않고 서로의 주장만 내세웠다. 결론은 내 부주의로 끝났다. 이 순간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그때 일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 또 머리를 쿡
쿡 치게 만든다.
오늘 일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만약 낮이고 누군가가 옆에 있었
다면 허둥대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레 보였을까. 실수할 때는
대부분이 망설이지 않는다. 두려움도 없다. 막상 일을 벌여 놓고야 알아
차린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푸념처럼 되뇐다.
내일 친구들과 만나면 자신의 아둔한 머리 탓으로 손발이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겠다. 그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까마귀 고기를 몇
접시나 먹었냐고 박장대소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주의력 부재는 나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 속에 소소한 실
수는 여러 사람을 웃게 만들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빠르고
잘난 사람만 많은 세상에 좀 모자란 사람 하나씩 섞기면 어떠랴. 아마
그 사람 쳐다보느라 바쁜 발길 한걸음 쉬어가니 생활이 조금 여유로워
지겠다. 자신을 자책만 하다가 한 생각 돌리니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
은 듯 마음이 가볍다.
또 한편 주의력 부재는 나를 성장시키기도 했다. 신중해야 할 일에는
옛일을 거울 삼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실수
는 완벽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완벽이라는 단어는 어울리
지 않지만 분명 부주의한 생활태도를 고치는 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부주의해서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헛일을 해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사람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실수
를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만들어 서로의 곁으로 다가서
기가 한결 쉬우리라 믿는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실수가 잦던 그때 일을 친구끼리 이야기
해 놓고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한동안 나를 자책한 덕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왔다고 믿었는데, 요즘 오히려 실수하는 횟수는
더 잦아졌다. 복잡해진 내 생활 때문인지, 아니면 세월 탓으로 돌리면
궁핍한 변명이 되겠지. 그렇지만 누구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하기에 자
신도 그냥 세월을 탓해 본다. 심한 경우만 아니면 손발이 좀 힘들다고
뭐 대수냐. 반편스런 자신의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이 살기 힘든 세상에 개그 한 편 보는 즐거움과 다름없으리
라.
윤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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