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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수필행] 원로 벚나무 - 박흥일

신아미디어 2012. 7. 4. 18:21

마음을 달래며 긴 호흡을 해봅니다. 큰 나무로 성장하는 수필과 비평을 꿈꾸어 봅니다.

 

 

 

 

 원로 벚나무


   봄이 왔다.
   바다가 물안개를 내품어 하늘과 땅의 눈을 가렸다. 오륙도 등대탑은
황소울음의 무적霧笛을 길게 불어 길 잃은 봄바람을 뭍으로 이끌었다.
   봄바람을 따라 꽃이 왔다.
   연분홍의 벚꽃이 캠퍼스를 덮었다. 소담스럽게 핀 벚꽃을 연구실에서
바라보다가 문득 오사카 대학에서 만난 벚나무가 떠올랐다.
   십오 년 전이다. 오사카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연구하고 있을 때다.
내 연구실은 실험장치가 있는 연구동의 2층에 있었으며, 책상은 아주
큰 유리창을 마주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옻칠을 한 듯 반질반질한 흑갈색 제복을 입은 그 벚나무는 대학
원 학생들이나 박사들이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살아서인지 먹물(?)이
들어 보였고, 배짱도 두둑해 보여 나는 그 벚나무를 원로 벚나무라고
불렀다.
   내가 그 연구실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그 원로
벚나무는 내 곁에 서 있었다. 내가 창밖을 보려하면 촘촘한 잔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시야를 가렸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한눈팔지 말고 연
구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순하게 받아들였다.
   그 원로 벚나무는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어제는 어떤 논문을 읽었고, 오늘은 어떤 데이터를
정리하였는지, 심지어는 연구실로 배달시킨 점심 도시락(벤토)의 단무지
개수까지 빤히 알았다. 매일매일 내가 기록하는 연구노트까지 창문 너
머로 보았을 터였기에 원로 벚나무에게 내가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그 원로 벚나무는 해가 뜨기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창문을 뚜드리며
연구를 독려하다가도 밤새 전자현미경을 보느라 충혈된 눈으로 연구실
로 돌아오는 날이면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날에는 원
로 벚나무의 가지도 흔들리지 않았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내
비위를 맞추느라 새들조차 내치고 숨죽이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이 연구도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벚
나무 가지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캄캄한 밤하늘도 못 본 척하며 파고들
었는데,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필마단기로 전력투구하였는데, 금맥은
커녕 맥석脈石을 골라내느라 진이 빠져갔다. 하기야 자연의 비밀을 풀어
내려는 침입자에게 그 열쇠를 쉽게 쥐어 줄 조물주가 어디 있겠는가?
   연구일지의 빈칸이 늘어가는 만큼 창밖을 내다보는 횟수도 늘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원로 벚나무는 송골송골 벚꽃 봉오리가 돋아나는 홍역
을 앓았다. 연분홍 불꽃으로 원로 벚나무가 꽃구름을 피우던 날, 때 아닌
봄눈이 벚꽃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벚꽃송이는 꽃무늬를 넣은 유리구슬
같이 꽁꽁 얼어붙었다. 엄동을 참고 견딘 화려한 벚꽃잔치는 허망하게
무산되었다. 원로 벚나무는 벚꽃잔치에 달뜬 얼굴이 무안했던지 연구실
창가에 붙어 서서 그까짓 실험 서너 번 실패한 것 가지고 무슨 허탈에
빠져있느냐고 오히려 나를 훈계하고 나섰다.
   그 원로 벚나무는 오사카로 떠나기 전 어머님이 나에게 당부한 말씀
을 되뇌었다. “장날마다 내 참깨만 팔리면 부자 안 될 사람 없지. 이번
장날 못 팔면 다음 장날에는 팔리겠지 하고 살아야지. 팔고 싶은 마음은
내 마음이고, 오늘 이 장터에 참깨를 사고 싶은 사람이 오지 않았을 뿐이
라고 생각해야지. 그런 걱정 저런 걱정 다하면 농사짓고 못 산다. 아들
아, 건강하게 잘 다녀와라.”
   연구도 농사같이 내 마음으로만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도
연구가 삐걱거리면 원로 벚나무를 생각하며 느슨해진 고삐를 다시 맨다.
   용당 캠퍼스에 벚꽃비가 내린다. 오늘도 오사카 대학의 그 원로 벚나
무는 창가에 기대서서 연구노트를 훑어보고 있을 것이다. 꽃이 피든지,
눈이 내리든지 아랑곳하지 앉고 실험에 몰두하는 이름 모를 젊은 연구
자에게 창밖에 벚꽃이 피었다고 옷소매를 당기고 있을 것 같다.
   어머님이 계신 그곳에도 벚꽃이 만발했으면 좋겠다.

 


박흥일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