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한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시를 읽어보면 어떠실지요.
신부용당申芙蓉堂1)
신부용당申芙蓉堂은 탁월한 여류시인女流詩人, 저 유명한 신광수申光洙
가2) 그 오라버니다. 나는 그녀의 시詩가 좋다. 다음은 그중 한 수, 제목
은<추일秋日(가을날)>.
하늘엔 둥둥 흰 구름 뜨고,
먼 들엔 사람들 돌아오는데,
푸른 강엔 한가로운 조각배 하나,
바람 일자 해오라긴 날아오르고.
連天白雲多, 遠野行人歸.
蒼江舟楫斜, 風吹白鷺飛. - ≪芙蓉詩選≫
나는 일찍이 이 시詩를 읽고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어느 산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들이 펼쳐져 있고 그 들 저쪽에는 푸른
강이 흐른다. 가을 어느 날이다. 날이 저문다. 마을 앞 먼 들길로 사람들
이 돌아온다. 아침에 나갔던 사람들이다. 푸른 강에는 조각배가 한가롭
다. 돌아오는 사람들 다 실어 건네고 지금은 편히 쉰다. 바람이 인다.
해오라기가 한가로이 난다.
이 시는 하나하나가 다 한가롭다. 하늘에 둥둥 뜬 흰 구름, 돌아오는
사람들의 느릿했을 발걸음, 노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舟楫斜) 배, 바람에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다 바쁠 게 없다. 꼬마들은 마을 어귀를 서성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장 보고 돌아오는 아버지 손엔 꼭 사탕 한 봉지가
들려 있었을 것이다.3)
이 시를 읽으면 바쁜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이 시를 읽노라면 문득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디 출입이라도 다녀오시면 나는 늦도록 대문 앞은 서
성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럴 때 그 어둠 속에 들리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갔다.
다음에 보이는 <초월야初月夜(초승달 뜬 밤)>도 나는 좋다.
물소리 맑아라, 고요한 이 밤,
초승달은 저 홀로 빛이 푸른데,
서늘한 바람에 산과山果 익으면
들에는 황금물결 길게 일겠네.
夜靜泉聲多, 初月明未央.
秋風山果熟, 廣野禾黍黃.
- ≪芙蓉詩選≫
나는 이 시詩를 읽고도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우리 옛 그 산山마을의 가을밤이다. 물소리 맑게 들리는 고요한 밤이
다. 초승달이 밤하늘에 산뜻하다.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 시인詩人
은 이 맑게 들리는 물소리, 산뜻하게 뜬 초승달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르
지 않는다. 열매 익어가는 산을 본다. 곡식 누런 들을 본다. 이 시에는
이런 생활이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이미 고귀한 가치다. 맑게 들리는
물소리, 산뜻하게 뜬 초승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산열매(山果)나 벼와 기장(禾黍) 같은 생활과 결부될 수 있다면 더욱 든든
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풍요로운 들이 있어야 가을하늘이 더 아름
다운 것처럼.4)
이 시를 읽으면 빈한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이 시를 읽노라면 문득 옛날 그 벼 베던 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
푸르고 바람은 서늘했다. 하지만 구부리고 낫질을 하노라면 땀은 쏟아
지고 허리는 끊어지는 듯했다. 아, 그러다 맞는 새참 한때, 찰찰 넘치게
따라주는 막걸리 한 대접으로 온통 천하가 다 시원했다. 살 것 같았다.
바쁜 마음이 한가로워지는 시, 빈한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시, 우리
가 부용당芙蓉堂의 시선詩選을 펼치고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여간
큰 행복이 아니다.
1) 申芙蓉堂(1732-1791) : 조선 영조 때의 詩人. 芙蓉堂은 그녀의 호.
별호는 山曉閣(산효각). 詩에 뛰어났다. 저서로 ≪芙蓉詩選≫.
2) 申光洙(1712-1775) : 조선 영조 때의 文人. 호는 石北. 文名을 떨쳤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石北集≫.
3) 필자 ≪한국 한시선≫(범우사,2006), 가을날의 저녁때(秋日).
4) 필자 ≪한시를 읽는 즐거움≫(학지사, 1997), 초승달 뜬 가을밤(初月夜).
정진권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명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과정) 졸업.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관,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동대학 명예교수.
수필집: ≪푸르른 나무들에 저 붉은 해를≫, ≪분이별, 삼돌이별≫ 등.
역해서: ≪한시를 읽는 즐거움≫, ≪한국고전수필선≫ 등, 그 밖에 선집, 논저 다수.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수필행] 배, 몸, 인간 - 박옥경 (0) | 2012.07.03 |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수필행] 객이 머물던 그 산방 - 김광영 (0) | 2012.07.03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더 아름다운 모습 - 최행자 (0) | 2012.07.02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어둠을 밝혀준 빛 - 정재호 (0) | 2012.07.02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 장기오 (0) | 2012.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