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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더 아름다운 모습 - 최행자

신아미디어 2012. 7. 2. 18:09

눈을 감고 수필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필의 잔잔한 마음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더 아름다운 모습


   오후 네 시 파리를 떠나면서 차창을 통해 이곳 경관을 열심히 바라보
았다. 나이가 있으니 언제 또 다시 올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갑자기
열차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국으로 가는 해저 터널이었다.
이름이 바닷속 터널이지 산속과 무엇이 다르랴. 모든 해저 터널이 그렇
듯이 바닷속은 상상일 뿐이다. 바닷속을 훤히 볼 수 있는 투명한 터널을
꿈꾸다가 어둠에서 빠져 나오니 영국 땅이다. 바다를 경계로 다르게 보
이는 지형이다. 같은 모양의 주택들은 친근한 이웃 같은데 지붕 색깔이
어두웠다. 프랑스는 빨간 색깔이었는데 영국은 검은 자줏빛이다. 역에
내리니 거리의 악사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손자와 손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흥미롭게 바라본다. 이국의 낯선 거리에 깔리는 저녁 어스
름이 나그네의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호텔에 짐을 풀고 밤거리로 나왔
다. 어디를 가나 먹고 마실 수 있는 거리는 북적대는 사람들로 활기차다.
   이튿날 일찍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들렀
다. 40명이 넘는 영국 왕의 대관식이 있었고 왕실의 결혼식이 모두 거행
됐던 곳이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도 이곳에서 화려한 결
혼식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다이애나는 비련의 여인
으로 36세의 짧은 생애를 끝내고 장례식까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며
칠 전 그의 아들 윌리엄 왕자도 이곳에서 결혼식을 했다.
   바로 옆 기념품 가게에선 윌리엄 왕자의 결혼사진과 다이애나비의 아
름다운 사진들이 많이 놓여있다. 그녀가 불운한 사고로 세상 떠난 지
1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사진 속에선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살아있
다. 그녀를 추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기념품들이다.
   템스 강 다리를 걸었다. 훗날 아이들과 함께한 여행을 추억하고 싶어
의사당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다. 다른 한국인 관광객
도 어린 아들과 딸을 카메라 앞에 세워 놓고 무척 분주하다. 11시 30분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걸음을 재촉
했다. 인근 공원을 가로질러 궁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얗
게 먼지를 일으킨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국 왕실의 전통
과 권위는 매일 이렇게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니 한세월 대
국을 이루었던 그들의 역사로 인한 국민들의 자긍심을 짐작게 한다. 근
위병들이 궁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으로 흩어져가는 관광객들의 뒷모습
이 싱겁게 느껴진다. 먼 나라에서 온 발걸음이 허탈해 보인다.
   깨끗하고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골동품과 잡화들이 가득한 노팅힐 골
목시장을 물어 찾아 갔다. 젊고 핸섬한 영국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아주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준다. 우리나라 인사동 골목처럼 시장골목은 사
람들이 법석이고 있다. 허술하게 벌여 놓은 좌판도 많아 구경하는 재미
가 괜찮다. 예쁜 소품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오래된 낡은 장난감들도 눈에
많이 띈다. 그것을 누가 살까 싶기도 하였다. 이곳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시장 관광은 여행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재미다. 아침부터 몇 시간
을 걸었더니 쉬고 싶었다. 골목 허술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때가 찌든
분위기가 시장과 잘 어울린다. 잠시 냉커피로 목을 축이고 갈 길을 재촉
하였다.
   시장에서 큰길로 나와 우리는 택시를 탔다. <맘마미아> 뮤지컬 예약
이 돼 있었다. 이곳에선 프랑스보다 택시 타기가 수월했다. 프랑스는
어른 셋에 아이가 둘 서 있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이곳 택시
는 안이 넓고 접었다 폈다 하는 간이 의자까지 있어서 오인 가족이 앉고
도 여분이 있다. 극장가가 번화하다. 외국에 와서 색다른 분위기를 즐겨
본다는 기대감에 일찍 좌석을 찾아 앉았다. 잠시 후 좌석은 빈자리 없이
꽉 차버렸다.
   한참 동안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무
대에 나와 춤과 함께 아바 노래를 열창한다. 관중이 모두 일어나 몸을
흔든다. 배우들은 열심히 춤추고 있는 노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흥
을 돋워 준다. 그들 따라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백발의 한 노신사에게
눈길이 멈췄다. 밖에 나오니 이국의 거리에 벌써 어둠이 내렸다. 이곳
극장가도 각 나라의 음식점과 카페의 불빛이 사람들을 붙잡고 흥청거린
다. 거리의 모습이 영국인이 100년 동안 홍콩에 심어놓은 까페 거리와
흡사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람들이 선 채로 거리를 메우고 대화를
즐긴다. 가슴속의 대화가 열려 있는 밤의 여유는 세상을 밝혀가는 또
다른 빛으로 느껴진다. 말동무가 있다면 나 또한 선 채 밤을 새워도 좋을
것 같은 거리의 모습이다.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부질
없이 솟구친다.
   이튿날 우리는 맨체스터 시로 가기 위해 차를 렌트했다. 런던에서 그
곳까지 4시간 거리라고 한다. 차는 씽씽 달리고 차창 밖은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에 눈이 싱그럽다. 시골 국도로 빠져 Stoke시로 향했다. 로얄
도자기 공장을 찾아 가는 길, 아름다운 마을에 닿자 우리는 잠시 차에서
내렸다. 이승에서 수만 리 길 달려 천국에 온 기분이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아담한 집들이 담도 없이 깨끗하고 예쁘게 마을을 이루었다. 나무
와 꽃들로 집들의 경계가 분명하지만 사람과의 경계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과 머리 위로 파란 하늘, 티 하나 보이지
않는 반듯한 사잇길, 무엇 하나 눈에 거슬리지 않는 마을이었다. 쉽게
차에 오르지 못하고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후 5시 지나 공장에 도착했다. 공장에서 직접 도자기 실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은 5시 전이라고 한다. 아쉬움을 갖고 매장에 들러 딸은 몇 가지
그릇을 장만하고 나는 커피잔을 샀다. 값이 훨씬 저렴하다. 노년에 내가
탐을 내는 것은 오직 찻잔이다. 이제 소유의 마음을 자꾸 털어 버리는데
커피잔만은 애착의 끈이 질기다. 우유 거품이 보글보글 오른 커피잔에
그리운 세월을 담고 앉아 맛을 음미하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
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렸을 때 성벽으로 싸인 중세도시 체스터 시에 도착
했다. 15세기의 도시 거리를 걸어본다. 벽은 흰색, 까만색 골조, 삼각 지붕
의 중세 집들이 길가에 나란히 그림처럼 줄을 서 있다. 중세의 세월 속에
파묻혀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곳 종업원의 얼굴이 동화 속에 나오
는 왕자를 닮았다. 이곳은 동화를 꿈꾸는 레스토랑임에 틀림없다. 젊은
아가씨들이 폼을 잡고 앉아 저녁 식사를 즐긴다. 모두 다 아름답고 꿈이
가득한 얼굴이다. 중세의 세월에 파묻힌 그림이다.
   내일 맨유 축구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한 중간 경유지 리버풀로 간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렌트 카에 짐을 척척 싣고 차에 오르는 가족의
모습은 흡사 유목민이다. 아니 이렇게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18세기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리버풀
은 그 당시 런던에 이은 제2의 항구 도시였다. 우리는 그때 노예들의
거래가 왕성했었다는 바닷가로 나갔다. 항구의 슬픈 사연을 말해주듯
음산해진 날씨가 비를 내리기 시작한다. 빗줄기를 타고 옷이 젖고, 옛날
노예들의 슬픔은 폐선에 남아 출렁이고, 파도는 철석철석 울음을 토해
낸다.
   그 이후 많은 변화로 침체되었던 이곳의 경제는 <예스터 데이>를 비
롯해 불멸의 히트곡들을 남긴 비틀즈의 명성으로 회생되었다 하니 그들
의 출생이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들 중 한 사람인
폴 메카트니가 성장한 집 앞에 이르니 한 여인이 관광객에게 집 내부를
안내하고 있었다. 공동주택처럼 연결되어 있는 작은 집이다. 우리는 예
약이 돼 있지 않아서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맨체스터 시로 갔다.
   첼시와 맨유의 경기가 있는 날, 우리나라 2002년 월드컵 때처럼 맨유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로 온통 시내가 술렁이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
도 티셔츠를 사 입고 경기장에 들어갔다. 들어서자 벽에 붙어 있는 박지
성 선수의 대형 사진이 먼저 눈에 띄었다. 경기를 할 때 포착된 멋진
폼이었다. 경기장에 선수들이 들어오고 관중석엔 입추의 여지 없이 사
람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가 앉은 쪽엔 맨유의 팬들이고 반대편엔 첼시
의 팬들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어 멋진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야유와 열
광의 함성이 뒤범벅이 되었다. 박지성이 볼을 몰고 가는 긴박한 순간엔
맨유 팬들이 모두 일어나 “come on pak” 하고 소리를 지른다. 가슴 벅찬
감격의 순간에 나의 손자 손녀까지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결승으로 가
는 맨유의 승리는 맨체스터 시를 완전히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분한 젊
은 맨유 팬들은 거리로 나와서도 계속 응원가를 부르고 기를 흔들었다.
좀체로 가라앉지 않는 열광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 현지 뉴스는 박지성
선수 칭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도 여행의 보람을 배가시켜 주
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우리는 참 행복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런던을 향하면서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잠시잠시 시골을 둘러보자
고 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두 시간 반 정도 걸려 닿은 곳이 잉글랜
드 중서부에 있는 cots wold다. 겉으론 아주 오래된 허술한 건물들이 작
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벽과 지붕이 흙빛과 잿빛이다. 집집마다 똑같이
네모진 연기통이 지붕 위로 솟아 있고 벽과 뾰족지붕 앞면에 만들어진
투박한 창은 폐쇄된 문처럼 꽉 닫혀있다. 어둡고 투박한 창은 그때 사람
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울타리도 없는 집 앞엔 갖가지 꽃들이
고운 색깔로 피어 마을을 한층 밝게 해 주었다.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 마을은 중세 때 cots wold에서 나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졌고 한때
방직공들이 살면서 모직을 짰다고 한다. 집들이 소박했지만 별스럽게
보이는 모양과 색깔,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의 켜가 엿보여 그림엽서에
서나 볼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1960년도 영국 정부에서 가장 아름
다운 시골마을로 선정한 곳답게 영국인들이 자가용을 타고 와 여유를
즐긴다. 길가 집들은 선물 가게와 카페로 개조돼 있다. 우리도 차를 잠시
세워놓고 오래된 벽난로가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좁은 사잇
길을 걸었다. 낮고 두터운 지붕에 야트막한 창, 바싹 붙은 집들이 그때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차는 다시 달리다가 bar ford라고 쓰여진 안내판을 보고 샛길로 빠져
좁은 나무 숲 시골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누구
의 농장이란 간판이 걸려있다. 숲길을 싱그럽게 달리면서 사방을 돌아
봐도 높은 산은 보이지 않고 완만한 구릉만 보인다. 막다른 곳에 이르
니 1600년대에 지어진 영주의 대저택이다. 회색빛 저택은 영화 <제인에
어>에 나오는 손 필드 저택과 같다. 꼭 영화는 이 저택에서 만들어졌을
것 같아 넓은 뜰에 서서 주인공들의 모습을 한참 그리는 재미도 가졌다.
   영주 로체스터와 어린 가정교사 제인에어의 사랑이야기가 환영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은 내부가 레스토랑으로 개조되고 앞에 펼쳐진
초원은 고즈넉하다. 돌아 나오다가 또 나무 숲에 싸인 대저택을 보았
다. 앞에 이르니 1580년 엘리자베스 1세 때 불란서 대사를 지낸 영주의
집이었다 그곳 역시 레스토랑으로 개조돼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식사
때가 아니라 숲속에 싸인 저택들은 적막하기만 했다. 한세월 영화를
누리며 산 영주들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인생
의 덧없음을 뜰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와 빛을 잃은 저택의 침묵이 말
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도 변함없이 보이는 것은 푸른 초원에 누워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는 소와 양들이다. 가축들의 우리가 보이지 않는 넓은 초원에
서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천국의 그림이었다. 평화로움을 가
득 품고 있는 초원, 지상에 더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을까?

 

 

최행자  -----------------------------------------------------------------------
1997년 ≪수필과비평≫ 등단.
작품집: ≪다시 하고 싶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