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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서소문鼠訴文 - 임형묵

신아미디어 2012. 7. 1. 17:01

수필에서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서소문鼠訴文


   <TV 동물농장> 보시는 양반네들! 그렇게 배 깔고 누워있지만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소. 새해 들어 바쁜 줄 알지만 불쌍한 놈에게 보시하는 셈치
고 청 한번 들어주시구려.
   화가 나서 그놈에게 분풀이를 좀 했소. 여태 그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
면 치가 떨려 말이 안 나온다오. 그런데도 집주인은 내 심정은 모른 채,
내게만 잘못이 있다고 몰아세우니 참! 만화 <톰과 제리>를 보며 깔깔대
며 웃을 때는 언제고, 그놈 체면 구긴 것만 갖고 트집을 잡으니, 그게
더 웃기는 일 아니오.
   주인은 내 허락도 없이 거실에 고양이란 놈을 들여놓았소. 그놈과 원
수지간인 걸 뻔히 알면서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얼룩무늬 등가죽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데다 덩치마저 집채만 한 놈이 눈앞에 턱 버티고
있었으니, 그 당시에 내가 얼마나 놀랐겠나. 그런데 녀석도 이곳이 처음
이라 불안해 떠는 건 나와 별다르지 않았어요. 그래 이때다 싶어 내가
먼저 녀석의 앞발을 물어뜯어 버렸지요. 원래 녀석은 낯선 환경에 잘 적
응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데, 난 녀석의 약점을 알고 있었어요. 아무리
덩치가 큰 녀석이라도 졸지에 그런 일을 당하면 도리가 있겠어요.
   그래 난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녀석을 거칠게 다뤘어요. 그러자
녀석은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질겁했고, 놀 때에도 내 발끝이 닿기라도
할까 봐 꽁무니를 뺐어요. 밥그릇과 잠자리를 빼앗아도 녀석은 나를 쫓
아내기는커녕 집 밖에서만 빙빙 돌았어요. 그때부터 나와 녀석의 상하
관계가 뒤바뀌게 된 거죠.
   어쨌거나 날이면 날마다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내는 녀석이 불쌍하긴
해요. 운명도 얄궂고요. 어릴 때 뭐든지 친구로 받아들이는 임계시기가
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나와 인연을 잘못 맺어 그리됐을 거라는 동물
전문의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소. 하긴 어렸을 적 잘못 각인된 기억은
질기도록 오래 가잖아요. 친구를 잘 사귀라는 말도 있고요. 그렇다고
녀석을 동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야성을 드러낼 게 분명
하니까요.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놈이니까요.
   눌려 지내고 아파하고 상처받아온 지난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요. 빛이 들지 않는 하수구나 시궁창에서 늘 숨어 지내왔단 말이오. 먹이
를 찾으려다 당신네들 발에 밟혀 죽고 몽둥이 뜸질을 당하고 약을 잘못
먹어 비틀거리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당신네들은 한 치의 반성은커녕
우리를 갖은 실험에 동원하고 사육 통에 가두는 짓을 하고 있지 않소.
그러면서도 애완동물이니 반려동물이니 하며 나와 동료를 놀려대니 악
질 중의 악질이요.
   약육강식의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방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어요.
고단한 신세에서 벗어나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
한이 없어요. 영악한 당신네들까지 내 편이 되어 주고, 그놈마저 내 슬하
에 있으니 뭘 더 바라요. 반전이지요, 반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단 말이오. 어둠에서 벗어나 그 시간을 즐기고 싶단 말이오.
   한데 그런 달콤한 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오.
집주인은 녀석이 조금 더 크면 나를 해칠까 하는 의구심에 각종 놀이기
구를 갖춘 넓은 놀이터에 먹이가 가득한 잠자리까지 갖춘 방을 따로 만
들려고 해요. 내가 바랐던 건 그게 아닌데도 말이오. 당신네들 같으면
그런 데서 하루를 살겠어요? 그 비좁고 답답한 데서 말이오. 감옥이 따
로 없지요, 감옥이! 그건 불행의 시작이고 빛이 보이지 않는 과거로의
귀환이란 말이오. 어둠의 터널로 다시 돌아가라고요! 그런 주인의 작태
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소.
   떨어져 살면 애틋함이 더하다는데 집주인은 그리움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싫어했든 미워했든 그동안 녀석과 한 공간에서 정붙이고 살
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말만 듣고 단박에 우리에 가두느냐 말이오.
나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귀여워 죽겠다고 얼굴 비빌 때는 언제고. 이웃
나라 중국의 한 도시에서는 쥐가 개를 물어뜯기도 하는데 내가 그 녀석
을 잡아먹기라도 했나요. 조금 못살게 군 걸 가지고 말이오.
   개 먹이를 훔쳐 달아나는 쥐도 있고, 개 발바닥에 올라 노는 쥐도 있어
요. 고양이와 한 먹이통에 머리를 박고 사이좋게 먹이를 나눠 먹는 쥐가
있고, 쥐가 달려들어도 잡아먹기는커녕 드러누워 배를 내주고 끌어안으
며 사랑으로 나날을 보내는 고양이도 있고요. 믿기지 않지만, 캘리포니
아 산타바바리에서는 서로 원수지간일 것 같은 개와 고양이와 쥐가 삼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요. 쥐가 고양이나 개 어느 등에서 덩실덩실 춤
을 춰도 서로 혀로 핥아주고 장단을 맞춰가며 산단 말이오.
   물론, 동물 세계에 존재하는 먹이사슬과 서열을 모르는 건 아니오.
실제로 먹고 먹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꼭 그런
불행한 일만 벌어지나요? 같이 지내다 보면 정이 들고 사이도 좋아지지
않겠어요.
   양반네들! 세상인심 점점 메말라 가는데 가끔가다 배꼽 잡는 일이라
도 있어야 숨통이 트이지 않겠어요. 수구니 진보니 꼴통이니 하며 편
나누느라 진 빼지 말고, 나만 잘살겠다고 엎는 사람 등 처먹지 말고, 그
런 시간 있으면 차라리 쥐와 고양이의 또 다른 만남을 주선해보는 게
낫지 않겠소.

 


임형묵  -----------------------------------------------------------------------
2003년 ≪문학 21≫ 등단.
수필집: ≪물소리 사람 사는 소리≫, ≪오늘은 날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