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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한국현대수필의 구조와 미학4] 피천득의 <인연> - 안성수

신아미디어 2012. 7. 1. 09:05

한국 현대 수필의 미학적 위상을 보여준 피천득님의 <인연>을 안성수님이 소개합니다.

 

 

 

한국현대수필의 구조와 미학·4
     - 피천득의 <인연>


1. <인연>의 미학을 찾아서
   괴테는 ≪파우스트≫를 완성하는 데 58년의 인생을 바쳤다. 20세에
구상하여 24세부터 집필을 시작한 뒤, 82세가 되던 1831년 전2권을 완성
한 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대성은 작품 자체가 주는 예술성과
철학성 외에도, 한 작품에 일생을 바친 장인적 작가정신 속에서도 빛난
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또한 장구한 세월 속에서 빚어낸 작품이다. 작
가가 17세부터 44세까지 27년 동안 10여 년마다 한 차례씩 만났던 아사
꼬와의 인연담을 19년 동안 가슴으로 다스려오다, 63세가 되던 1973년
가을 수필로 털어놓았다. 따라서 이 특별한 인연담을 완성하기까지 46
년이 걸린 셈이다.
   수필 <인연> 속에는 몇 가지 역사적 가치가 내재한다. 우선, 그의 대표
작으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그의 인연철학과 삶의 미학을 형상화한 작
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한국수필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독자들의
총애를 받음으로써, 한국 수필문학의 붐을 조성하는 데도 크게 일조했
다. 한국 현대문학이 시와 소설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 그는 법정과
함께 수필장르에 독자들을 불러 모은 장본인이자 선두 주자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피천득 수필의 무엇이 독자들을 사로잡았을까.
문학성인가, 작가의 인품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이 물음이 바로 <인연>
을 비평적 차원에서 살피게 한 동기가 되었다. 수필작가는 작품으로 자
신의 삶과 철학을 보여주고, 자신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진솔하게 고백
한다는 점에서, 수필 텍스트는 작가와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
어주는 통로이다. 그 고상한 만남을 위해, 그리고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의미 있는 삶의 법칙과 조우하기 위해, 우리들은 텍스트의 숲을 창조적
으로 탐색해야 한다.


2. <인연>의 텍스트 전문
   피천득은 그의 대표작이 된 <인연>을 1973년 ≪수필문학≫ 11월호에
발표하였다. 이 비평 텍스트는 1996년 5월 20일 샘터사에서 간행한 수필
집 ≪인연因緣≫에서 뽑았다.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
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
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
을 하는 아사꼬(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
고 아사꼬(朝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
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꼬는 ‘스위
트피’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
피’는 아사꼬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꼬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
고 있었다. 아사꼬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꼬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동안 나는 초등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꼬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아사꼬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
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삼 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
꼬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
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꼬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
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버
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
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
다.
   그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
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꼬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
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을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서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돼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꼬는 전
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꼬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꼬의 집으로 안
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꼬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꼬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
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
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꼬의 얼굴이
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3. ‘낯설게 하기’ 서술전략과 독법
  
이 수필은 천천히 곱씹듯이 읽어야 제 맛이 난다. 따라서 독자는 가급
적 문장 간의 거리를 확보한 뒤, 딱딱한 견과류를 씹을 때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게 문맥을 살피며 읽는 것이 좋다. 그래야 행간에 은폐된 작가
의 의도를 실감나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피천득의 문제작답게 그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다양
한 미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울림통을 디자인했다. 언젠가 한 TV방송의
아나운서가 참 읽기 어려운 작품임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것은 감정이
제거된 사실 위주의 문장을 동일한 종결어미의 문장 속에 담아냈기 때
문이다. 그러한 문장들이 제공하는 음운론적 효과는 거친 리듬과 조각
글 같은 낯섦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하드보일드 타입의 문체는 건조한 카메라의 눈처럼
세 번의 만남과 떠남을 마치 독립된 장면처럼 시퀀스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유사한 서술 형식을 반복함으로써 문장을 낯설게 만들
고, 독자는 그런 작가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그만큼 강렬한 감동과 만난
다. 이것이 바로 피천득이 46년 동안 가슴에 안고 쓸어내리면서 연민에
빠져 산 세월을 개성 있는 인연철학으로 들려주는 수사 전략이다.
   예컨대, 작가는 이 작품을 정상 속도에서 일탈시켜 특수한 리듬으로
읽게 하기 위해 몇 가지 문장 전략을 사용한다. 첫 번째는 “-았다.” “-었
다”의 종결어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전체 문장의 85퍼센
트를 차지하고 있는 “-았다.” “-었다”의 빈번한 사용은 발음의 동어반복
현상에 의해 리듬을 깨는 효과를 발휘한다. 피천득은 이러한 문장을 의
도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들이 문장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준다. 독자들
이 문장에 오래 머물수록 작가의 창작의도는 보다 깊고 진실하게 포착
되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가급적 감정을 절제하거나 배제시킨 단순한 사건 진술의
문장을 즐겨 사용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수사 전략은 주관적 감정이 절
제된 문장을 사용하여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와 관련된다. 이를테면, 감정을 증류시킨 건조한 문장을 통해서 일
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이 어떻게 소시민의 인연을 바꾸어 놓았는가
를 조용히, 그러나 통렬하게 고발한다.
   세 번째는 문장 길이의 간소화 전략이다. 사건의 단순한 줄거리 진술
에 목표를 둠으로써 수사적 꾸밈과 묘사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또한
주관적 표현에 의한 오해를 줄이고, 최소한의 줄거리만으로 사건의 진
상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이다. 이런 문장 전략은 긴 세
월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인연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이끈다.
   네 번째 전략은 의미생성 방식에서 발견된다. 개개의 문장에 의해 문
학적 의미를 창조하기보다는 사건과 전체 구조에 의해 의미를 생성한
다. 이 경우에도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각개의 문장에서 배제하고 전체
구조와 이야기를 통해서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과 전말은
남고, 작가의 주관적 감정과 논리는 인연의 구조 속에 내포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어떻게 집단담론의 폭력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가를 폭로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오히려 목소리를 낮춘
다. 실제로 작가는 전쟁담론에 대한 언급을 세 번째 만남 장면에서만
조용하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적어도 두 사람의 인연담론과 일본이라는 거대
국가집단이 일으킨 전쟁담론을 교차시켜 당대의 비극을 고발한다. 겉층
에는 비극적 인연담론이 흐르게 하고, 속층에는 전쟁담론에 대한 고발
과 폭로구조를 상징적으로 작동시키는 이중구조 전략을 쓴다. 이런 구
조적 특성을 인식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평자들이 주장한 낭만적인 인연
담론에서 푸코식의 역사성을 함유한 교차적 집단담론 속으로 이행하는
새로움과 만난다.


4. ‘인연’ 크로노토프의 진실
  
<인연>은 피천득이 63세가 되던 1973년 11월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합방의 수모를 당한 1910년에 태어나 3·1
운동과 2차 세계대전, 8·15해방, 6·25사변과 4·19의거, 5·16군사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두루 목격한 뒤 2007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인연>의 주인공인 아사꼬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에 대한 일제 식
민통치가 한창이던 1927년 봄 17세 때의 일이다. 그 후, 44세가 되던 1954
년 세 번째 방문을 끝으로 그녀와의 인연을 접은 뒤, 19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사꼬와의 추억을 1973년 11월 한 편의 수필로 완성한다.
   작가는 아사꼬와의 아름다운 인연이 짝사랑의 연정戀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작중에서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라
고 언급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작가는 또한 세 번째 방문에서 그녀의 결혼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녀의
집 앞에서 어린 아사꼬가 던진 옛말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토한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
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고백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현실에 대한 작가의 탄식이 들
어있다. 역사란 가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두 사람을 떼어놓
은 숙명적 인연에 대한 넋두리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여기서 이 세 역사
적 사건의 주동자와 동기 제공자가 바로 일본이었다는 점을 암시함으로
써 일제의 침략전쟁에 특별한 크로노토프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테
면, 피천득과 아사꼬의 실연失戀의 비극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이 벌인 침략전쟁의 역사적, 사회적 소용
돌이가 두 사람의 인연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는 이중적인 상징구조가 내재한다. 표층에는 작
가가 청소년기부터 중년기까지 약 27여 년의 시공간 속에서 펼쳤던 아사
꼬와의 인연담이 담겨 있다. 그리고 심층에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인 관계성을 알레고리 형식으로 숨겨놓고 있다.
마치 작가와 아사꼬의 인연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한국과 일본
의 관계 또한 숙명적인 관계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두 사람의 인연을 숙명적인 비
극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다. 개인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전쟁을
유발하여 마치 그들의 이별이 숙명인 것처럼 인식하게 했다. 이것은 분
명 전쟁담론이 뒤집어씌운 허구적 기만술이다. 그들의 이별 인연은 선
험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것
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의 이러한 이중 구조적 특성을 ‘시침떼기’ 전략에 실어 ‘낯
설게 하기’ 효과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은 표층의 이
야기에만 매달리기 십상이지만, 작가는 이상李箱의 <날개>처럼 표층과
심층의 이중구조를 설정하여 두 사람의 인연을 불행으로 이끈 일제의
부도덕과 반 인도주의를 격조 있게 고발한다.
   이제 망원경을 통해서 반세기의 시공간 속에서 펼쳐졌던 이별의 인연
을 조망하고, 그 안타까운 상황을 현미경과 프리즘의 렌즈 속으로 끌어
들여 성찰함으로써 인연담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한다.


5. 2중 액자구조와 패턴의 힘
   한 작품의 서사구조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플롯이 존
재해야 한다. 이 수필은 이중 액자구조 속에 세 번의 만남과 이별 이야기
를 패턴에 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 ‘생각하기 패턴’을 삽입하여 인연담
의 논리성을 확보한다.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를 추상하기 위해서 핵심사건을 기능적으로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지난 4월에 못간 춘천 성심여자대학에 가고 싶다
②나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③17세가 되던 해 봄, 처음으로 동경
을 방문했다 ④미우라 선생 댁에서 스위트피꽃을 닮은 귀여운 아사꼬를
만났다 ⑤소학교 1학년인 그녀는 교실에서 하얀 운동화를 보여주었다
⑥그녀는 이별 선물로 볼 키스와 손수건, 작은 반지를 주었다 ⑦10년
후쯤 좋은 상대가 될 거라는 선생 부인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⑧나는
이별선물로 안델센 동화책을 주었다 ⑨그동안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꼬를 생각했다. ⑩13,4년이 지난 4월, 미우라 댁을 두 번째 찾았다
⑪영문과생인 그녀는 목련꽃 같은 청순하고 세련된 숙녀가 되어 있었
다. ⑫산책길에 신발장 이야기를 묻자 기억하지 못했다 ⑬그녀 연두색
우산을 본 뒤, 나는 영화<쉘부르의 우산>을 몹시 좋아한다 ⑭밤늦게까
지 문학과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⑮10여 년 동안 그녀
를 많이 걱정했다. ⑯1954년 미국행 길에 세 번째 찾아갔다 ⑰아사꼬는
진주군인 일본인 2세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 ⑱아사꼬의 결혼소식이 마
음에 걸렸다 ⑲그녀의 집을 보자 함께 살자던 옛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⑳십 년쯤 전쟁이 미리 나고, 독립되었다면 함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
다 ㉑아사꼬 얼굴은 백합같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㉒그녀의 결혼한 것을
아쉬워하며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㉓세 번째 만남은 만나지 않았어야
좋았을 것이다 ㉔주말엔 춘천에 다녀오려고 한다.
   전체구조의 차원에서 <인연>의 이야기는 <도입액자(①~②)+내부이
야기(③~㉒)+종결액자(㉓~㉔)>의 전형적인 이중 액자구조를 사용한다.
도입액자 속에서는 춘천방문 소망을 생각하기 패턴에 실어 주제를 암시
하고, 내부이야기에서는 세 차례의 만남과 작별의 전말을 방문 패턴으
로 들려준다. 종결액자에서는 생각하기 패턴과 춘천 방문소망을 묶어
주제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이 수필은 <도입액자(춘천방문 소망-생각하
기 패턴)>+<내부이야기(1차 방문+생각하기 패턴-2차 방문+생각하기 패
턴-3차 방문>+<종결액자(생각하기 패턴-춘천방문 다짐)>의 구조에 의해
형상화된다.
   이 작품의 도입부분과 종결부분을 이끄는 이중액자와 내부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문 패턴, 그리고 전체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생각하기 패
턴은 인연담의 핵심구조를 구축하는 지배적인 기법들이다. 수필의 액자
는 소설서사와는 달리, 작가의 체험을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써 사실성
의 순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먼저 ‘생각하기 패턴’은 도입액자와 내부이야기, 종결액자 속에서 각
기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도입액자 속(①)에서는 아사꼬가 다니던 학교
와 동명의 대학인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여 46년 동안 가슴속에서
키워온 짝사랑의 그리움을 추억하게 충동질한다. 내부이야기 속(⑨,⑬,
⑮)에서는 작가에게 두 번째 동경 방문과 세 번째 방문을 유도하고, 아사
꼬에 대한 짝사랑을 환기하는 동기부여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종
결액자 속(㉓,㉔)에서는 지난 세 번째 만남에 대한 반성과 춘천 성심여
자대학의 방문을 다짐한다. 이렇게 볼 때, ‘생각하기 패턴’은 내부이야기
에서는 아사꼬 방문 욕구와 짝사랑을 심화시키는 동기부여로, 액자에서
는 46년의 인연에서 생성되는 그리움과 연민을 다스리는 절제의 심미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방문 패턴’은 작가가 세 차례에 걸쳐 동경의 아사꼬를 찾아가는 만남
과 이별의 반복적 이야기를 가리킨다. 1차 방문(③~⑧: 호감과 친밀감
생성)→2차 방문(⑨~⑭: 짝사랑의 연정으로 발전)→3차 방문(⑮~㉒: 인
연단절 확인과 연민 생성)의 형태로 반복되면서 패턴화한다. 이러한 방
문 패턴은 주로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행위를 통해서 두 사람 사이에 생
성된 인연의 전말을 보여주고, 작중인물의 성격창조와 주제의 형상화에
도 기여한다. 이러한 내부이야기의 인연담은 인과적 차원에서 보면 액
자 이야기의 원인에 해당된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객관적상관물도 다채롭게 활용한다. 세 번의
만남과 이별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마음에 비친 아사꼬의 이미지는 꽃
과 색깔로 비유된다. 첫 번째 방문에서 만난 아사꼬는 스위트피꽃과 하
얀 운동화로 상징된다. 어리고 귀여운 꽃으로 표현된 스위트피와 고귀,
순결의 이미지인 하얀색은 아사꼬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이다. 두 사람이
헤어지면서 주고받는 선물도 친밀감을 안겨주기에 족하다. 아사꼬는 소
학교 1학년 어린이답게 볼키스와 제가 쓰던 손수건, 작은 반지를 건네고,
17세의 피천득은 안델센 동화책을 준다. 아사꼬의 이별 선물과 키스는
10살 때 어머니와 사별한 작가에게 친밀감과 호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
다. 한편, 작가가 건넨 동화책은 아사꼬가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기대심
리가 내재해 있다.
   두 번째 만난 아사꼬는 청순하고 세련된 목련꽃과 연두색 이미지로
비유된다. 영문과 3학년생으로 성장한 아사꼬는 기품과 우아, 고귀의
상징인 목련꽃과 안식, 지성, 온정, 희망 등을 상징하는 연두색으로 비유
된다.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1차 방문 후, 비슷한 또래 아이
를 볼 때마다 아사꼬 생각을 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친밀감과 호감이
그리움으로 생성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호감과 그리움은 짝사랑의
연정으로 발전한다.
   세 번째 방문에서 아사꼬는 싱싱해야 할 젊은 나이에 시든 백합꽃으
로 비유된다. 이것은 환희, 순결, 청초의 이미지로부터 추함과 절망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아사꼬의 시든 모습을 보고
돌아온 그는 19년 후, 그 세 번째 만남을 몹시 후회한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을 남겨둠으로써 스위트피나 목련꽃, 하얀색이나 연두색의 이미지
로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 상관물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은 피천득이 영문학자이자 시인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적절하게 활용
한 결과로 보인다.


6. 이별의 인사법과 심리적 거리
  
아사꼬가 세 번에 걸친 이별시에 보여준 인사법은 두 사람 간의 심리
적 거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이별시에는 아사꼬가 볼키스
와 쓰던 손수건과 작은 반지를 주고, 작가는 안델센 동화책으로 화답한
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 뒤에는 오빠처럼 따르던 작가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준 동화책 또한 그녀가 동화의 주인공처
럼 잘 자라서 좋은 인연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들의
행동을 지켜본 아사꼬 어머니가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
요.”라고 긍정적 메시지를 전한 것도 그들의 인연에 대한 기대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두 번째 이별 인사법에는 다소의 심리적 거리감이 감지된다. 아사꼬
는 10여 년 전 첫 만남 시에 자신이 들려준 신발장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다. 이것은 13,4년 만이라는 시간적 거리 속에서 피천득에 대한 아사
꼬의 호감과 친밀감이 소멸했거나 약화되어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거
리감은 작가가 숙녀로 성장한 아사꼬와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꽃을 동일
시하고, 그녀가 교실에서 가지고 나온 우산의 연두색을 잊지 못해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몹시 좋아하게 된 심리적 배경과는 사뭇 다르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이러한 심리적 거리는 무심함과 연정의 발생이라
는 감정적 거리와 일치한다. 아사꼬가 1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그에 대한
친밀감과 호감을 상실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에 대한 작가의 호감과
친밀감은 오히려 짝사랑의 연정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밤늦
게까지 아사꼬와 함께 문학 이야기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녀의 스러진 호감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한 연
정의 표현이다. 이에 비해, 아사꼬가 그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진
것은 호감의 약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만, 그녀의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된 목련의 꽃말이 사모, 혹은 숭고한 정신이나 이
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점도 암시적이다.
   세 번째 작별 인사법은 그들의 인연이 단절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시
사한다.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고백이 그 증거이
다. 그것은 아사꼬의 결혼과 관계가 있다. 그녀의 결혼은 그동안 지속해
온 작가와의 인연의 단절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이미지를 ‘시들
어가는 백합’에 비유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순결과 순수의 이미지로
상징되던 백합의 추한 모습을 통해서 그녀에 대한 호감은 연민으로 바
뀐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遠因을 작가는 냉정한 어조로 언급한다. 그것은 세
번째 방문의 지연 동기로 설명한 제2차 세계대전과 우리나라의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등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방
해하여 그들의 인연을 단절시켜 놓은 직접원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7. ‘인연’의 메커니즘과 운명관
  
이 수필에 내재된 작가의 인연관은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작
가는 두 사람 사이에 생성되던 아름다운 인연의 단절 동기를 미지의 절
대자의 힘이나 우주적 운명에서 찾지 않는다. 이것은 피천득이 아사꼬
와의 비극적 인연의 동기를 절대적인 운명의 힘에서 찾지 않고, 인재人災
로서의 집단담론에서 찾고 있음을 뜻한다.
   작가의 시선은 개인 간의 소박한 인연이 국가라는 거대 집단담론이
일으킨 전쟁의 횡포에 무참히 파괴되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침략전쟁의 주체로서 일본을 암시적으로 지목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조용하지만 결코 묵과하지 않는 냉엄한 고발의 어조를 보여준
다. 한 국가의 이기적인 전쟁에 아름답고 순결한 두 사람의 인연이 무참
히 짓밟힌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이야기 속에서 인연의 생성과 소멸과정은 3단계로 전개된다. 1차
방문(③~⑧)은 아사꼬에 대한 작가의 호감과 친밀감 생성 단계로, 2차
방문(⑨~⑭)은 그녀에 대한 연정이 짝사랑으로 발전하는 단계로, 그리고
3차 방문(⑮~㉒)은 인연 단절의 확인과 연민 생성의 단계로 명명할 수
있다. 방문 패턴은 주로 만남과 이별의 반복을 통해서 인연생성의 전말
을 보여주는 외에도, 작중인물의 성격창조와 주제의 형상화에 기여한
다. 이러한 내부이야기의 인연담은 인과적으로 보면 액자 이야기의 원
인에 해당된다.
   따라서 내부이야기는 1차 만남과 2차 만남을 통해서 인연의 생성조짐
을 보여주고, 3차 만남의 직전에 인연 단절의 숙명적 동기를 삽입함으로
써 3차 만남의 인연 단절이 일본의 전쟁담론에서 야기된 것임을 시사한
다. 이렇게 하여, 인연 메커니즘은 <인연담 암시-인연의 생성과 단절의
전말(인연생성 조짐+인연단절 동기+인연단절)-인연 신비 자각>의 구조
로 형상화된다.

 

                  


   작가는 이러한 인연담의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내부이야기의 앞
뒤에는 액자를 설치한다. 그리고 일제가 벌인 전쟁이 그들의 인연을 단
절시킨 원인이었음을 조용히 내보임으로써 오히려 그 비애를 극대화한
다. 그 결과 인연 메커니즘은 미적 울림이 큰 이중 액자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인연담론이 전쟁담론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고발하게 된다.
   작가는 종결액자에 이르러 인연에 대한 두 가지 중대한 깨달음을 획
득한다. 첫째, 인연이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
적 욕구에 의해 파괴된다는 점이다. 둘째, 인연은 지혜롭게 다스려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종결액자에서 인연과 만남의 신비를 3가지로 유
형화한다. 첫 번째는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는 경우
로서, 그리움을 극대화시켜 가슴에 안고 사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일생
을 못 잊으면서도 만나지 않고 사는 경우로서, 초월적 절제력으로 그리
움을 절대화시키는 유형이다. 세 번째는 자신의 경우로서, 세 번 만나고
나서 마지막 만남을 후회와 연민으로 돌려받고 안타까워하며 사는 유형
이다.
   그런 아픔과 아쉬움 때문에 인연이 발생한 지 46년이 흐른 1973년 가
을,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고자 한다. 작가에게 세 번째 만남은
단절된 인연에 대한 슬픈 확인과정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서 인연은 흔히 삶 속에 운명을 끌어들이는 힘
으로 작용한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운명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그
힘에 의해 생의 인연이 이끌린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하지만 피천득은
운명의 힘에 의해 인연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삶은 지혜를 발휘
하여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아사꼬와의 만남 인연을 지혜롭게 다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시간적으로도 그녀가 결혼했을 것임을 예측했으면서도 미국
방문길에 세 번째 방문을 한다. 그 결과 아사꼬에게서 얻은 귀여운 스위
트피와 청순하고 세련된 목련의 이미지를 잃게 된다. 작가는 그 세 번째
만남을 남겨두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피천득은 예지적 운명관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그는 운명이 맺어
준 인연도 지혜롭게 다스리며 살아야 할 변증법적 실천의 대상으로 인
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정의 심리분석과 승화의 미학
   인간관계에서 호감이나 친밀감은 기본적으로 인정人情을 발생시키고,
인정은 보다 구체적인 질적 관계로 발전하여 사랑을 생성한다. 이러한
정 또는 인정人情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 사람의 다사로운 마음”이다.
인정은 사람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로서 폭넓은 윤리
적 공감대를 갖는다. 인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헌신과 봉사, 염려와
기원, 보호와 합일 등의 감정으로 발전할 때 사랑의 감정으로 고양된다.
   정과 사랑의 심리적 발전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만남에 내재된 욕
구와 정서를 시공간 지표와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욕망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욕망의 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심리 분석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도표가 제시하는 것처럼, 수필 <인연>에서는 세 차례의 만남과 이
별이 이루어진다. 1차 만남에서는 여덟 살의 아사꼬와 열일곱 살의 피
천득이 서로 인정 수준의 호감을 보이면서 친밀감을 주고받는 정도이
다. 아홉 살의 나이차를 넘어, 서로 부담 없이 주고받는 작별 선물에서도
그러한 심리가 발견된다.
   2차 만남은 1차 만남이 끝난 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라는 시간지표가 있으나 애매하다. 따라서 시간지표가 1954년
으로 명확히 제시된 3차 만남으로부터 역산逆算하면, 1차 만남 후 14년이
지난 1941년쯤으로 계산되지만 역시 불명확하다. 2차 만남에서 작가는
목련꽃처럼 청순하고 세련되게 대학생으로 성장한 아사꼬에게 연정의
맹아萌芽 조짐을 보인다.
   여기서 작가의 연정은 우정 수준을 넘어 짝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다. 그 근거로는 두 번째 만남 시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이야기 하다 헤어지는 장면과 산책길에 교실
에서 가지고 온 연두색 우산에 반하여,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아사꼬는 십여 년 전 자신이 들려준 신발장 이야기를
망각하고 있고,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이는 그녀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어떤 특
별한 감정보다는 십여 년마다 찾아오는 지인에게 보여주는 우정이나 친
밀감을 느끼는 정도이다.
   우리는 피천득의 심리적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전시戰時에
일본까지 아사꼬를 찾아갔음에도 여전히 열정을 보여주거나 정표를 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쟁 중에 찾아간 것만으로도 일종의 프러포즈의
의미를 띨 수 있으나 그는 속마음을 숨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피천득이
이 무렵에 보여준 아사꼬에 대한 연정의 빛깔은 그가 <맛과 멋>에서도
언급한 플라토닉 러브의 수준으로 읽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그가 두 번째 만남에서 왜 열정과 정표를 보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피천득이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는 상황 속에
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결혼을 한 것
인지, 아니면 결혼을 하고서도 짝사랑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독자들
의 상상력에 맡겨진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 두 번째 만남을 계기로
연정(戀情;짝사랑)의 이미지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3차 만남은 끔찍한 전쟁이 두 사람의 해후를 가로막고 있다가, 1954년
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2차 만남으로
부터 13년의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두 사람의 상대에 대한 감정은 큰 변
화를 보인다. 큰 변화란 전쟁으로 고통스런 시간이 적잖이 흘렀다는 점,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결혼을 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사꼬
는 세월 속에서 ‘싱싱해야 할 젊은 나이에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얼굴이
되었고’,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지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심리적 반전상황이 곧 연정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후 19년 동안 만남 행위를 종결했으면서도
연민 어린 작품으로 쏟아놓았다는 점이 그 반증이다. 또한 가슴 아픈
세 번째 만남을 후회하면서, 주말에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여 추
억을 다스리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가 여전히 짝사랑의 미련
을 연민의 감정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국, 피천득에게 아사꼬와의 긴 인연은 플라토닉 러브의 범주 속에
서 맴돌며 환기된다. 그 낭만적 기억을 이순을 넘긴 나이(63세)에 작품
으로 고백했다는 점에서 슬프지만 아름답다. 이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일생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여인에 대한 예의이자 가장 격조 있는 또
하나의 해후 방식이다.


9. 인연으로 빚어낸 미의식과 멋
  
이제, 작품에 내재된 미의식을 읽어낼 차례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기
본적으로 미적 대상임을 전제할 때, 수필작품 속에서 생성된 미의식을
음미하는 것은 작품 해석의 최종적인 단계에 해당된다. 그것은 곧 작가
가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성찰 속에서 획득되는
철학적 울림의 멋과 힘이다.
   이 수필의 미의식은 패턴형식으로 주어진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의
감정 속에서 창조된다. 그것은 아사꼬의 행동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 만
들어 내는 정서적 결과물이다. 1차 만남에서 작가 느끼는 미의식은 소학
교 일 학년인 아사꼬의 순결하고 순수한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견된다.
집 뜰에서 스위트피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주고, 교실에서 하얀 운동화
를 보여주며, 제가 쓰던 물건들을 볼키스와 함께 이별 선물로 주던 아사
꼬의 행동 속에 담긴 미의식은 순수미이다. 그리고 그런 아사꼬의 청순
한 행동에 작가가 화답형식으로 준 안델센 동화책의 이미지 또한 순수
미이다.
   2차 만남에서 영문학과 3학년 대학생으로 성장한 아사꼬의 객관적 상
관물에 비친 미의식은 청순, 세련, 성숙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우아미
이다. 이런 미의식은 작품 속에서 우아함으로 상징되는 목련꽃과 고운
연두색 우산으로 암시된다. 세 번째 만남이 주는 미의식은 전후에 일본
인 2세와 결혼하고, 그 혹독한 세월 속에서 시들어 가는 아사꼬의 백합 이미
지로 주어진다. 이러한 인식 충격은 작가에게 미의식의 반전(peripeteia)
상황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녀를 만난 후 27년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해
온 순결과 우아함의 상실을 뜻한다. 그러한 충격적 상실감 속에서 만나
는 미의식은 비극적 연민이다.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의 행동 속에서 생성된 미의식은 종결액자에 이
르러 하나의 통일된 정서적 빛깔로 수렴된다. 운명적인 인연의 힘에 종
속되기보다는 지혜로운 인연의 다스림에 비중을 두는 작가의 인연철학
은 세속의 차원에서 다소 비껴서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자기 평가의 언어는 소중한 인연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
겨두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게 한다. 예컨대, 인연은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지혜롭게 다스려야 할 대상임
을 뒤늦게 깨달은 자의 탄식이다. 이것은 그가 46년의 세월 속에서 깨달
은 비극미의 정수이다.
   이러한 비극적 정서는 선비풍의 높은 격조와 자기성찰적 절제의 미덕
을 내포하면서 보다 고양된 품격미로 고양된다. 이처럼 절제된 품격미
속에는 한국 선비의 낭만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승화된 작가정신이
내재한다. 그러한 충만성은 이상과 현실의 갈등구조 속에서 고뇌하는
자의 낭만적 아이러니를 생성한다. 그 속에 의리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
는 작가의 순결한 인연철학이 숨을 쉰다.
   종결액자가 수렴해낸 총체적 미의식은 단순한 비극적 이미지를 초월
한다. 그것은 낭만적 기다림 속에서 반세기 동안 인연을 갈무리해온 장
인적 미의식으로 승화된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
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란 마지막 문장 속에는 열일곱 살에
만난 아사꼬와의 인연을 결코 잊지 못하는 작가의 우정과 연정 속에 잠
재된 비장한 낭만적 슬픔이 묻어난다.
   비장미, 이것은 피천득이 27년 동안의 만남과 그에 대한 19년 동안의
발효와 숙성기간을 거쳐 46년 만에 완성시킨 인연철학의 빛깔이다. 그
가 행복해 보이는 것은 그런 슬프고도 아름다운 연정을 일생 동안 껴안
고 산 작가였기 때문이다.


10. 교차담론의 전복과 주제 울림
   끝으로, 주제의 울림을 살펴볼 차례이다. 수필에서 인물은 작가 자신
이거나 작가가 관찰하는 대상이다. <인연>에서는 작가와 아사꼬가 분석
의 대상이다. 모든 작품 속에는 인물의 욕망체계가 작동되는데, 그것은
흔히 변증법적 논리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상이나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
한다.
   <인연>은 단순한 짝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수필은 국가담론이 개인담론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주는
교차담론의 텍스트이다. 피천득은 27년 동안 아사꼬를 대상으로 세 번
의 만남을 통하여 짝사랑의 인연을 키워왔다면, 아사꼬는 작가의 연정
을 인식하기도 전에 긴 전쟁의 세월에 쫓겨 인연의 끈을 상실하고 만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사랑을 가로 막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존
재한다.
   이때, 비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의 힘이 집단 이념을 앞세워 그 국가의 주체인 국민의 행복을 파괴
하기 때문이다. 아사꼬의 인연은 바로 그런 국가폭력의 아이러니적 희
생물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
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
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런 생각을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역사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연>은 액자식 이중구조를 통해서 그러한 모순 구조를 알레고리적
으로 폭로 고발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겉층에는 피천득과 아사꼬의
비극적 인연담을 배치하고, 속층에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가 일
제의 침략적 소행으로 국가 간의 인연이 깨어진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
러니까 피천득과 아사꼬의 인연담이 보조관념이라면, 한국과 일본 관계
가 보여주는 국가담론은 원관념으로 숨겨놓은 형국이다.
   한 국가의 전쟁담론이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개인담론에 비해 우월하
며, 우선한다고 보는 파시스트적 발상에서 나온다. 작가는 그런 국가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두 사람의 소박한 개인적 인연담론을 통하여
고발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 첫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 전쟁담론이 일으킨 문제의식을 풍자하는 데
있다. 둘째는 그러한 풍자의 토대 위에서, 개인담론과 국가담론을 등가
적으로 위치시키거나 기존의 관념을 전복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담론
주체의 전복이야말로 개별담론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전쟁담론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지닌다는 데 윤리적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이념적 담론차원을 뛰어넘지 못함으로써 인
연의 궁극적 본성이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다. 예컨대, 그 인연의 본질
을 우주 법칙에 의한 우주적 만남이나 본질세계와의 교통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의 울림통은 보다 큰 세계를 지향하게 되었을 것이
다. 그런 철학적 인식보다는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정人情의 심미작
용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 나름의 한계를 갖는다.
   작가의 인연철학은 이 수필의 종결액자 속에 압축적으로 수렴되어 있
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라는 명문 속에 내재한다. 전자의
인연이 운명의 힘에 의해 이끌린다면, 후자는 인연을 영원히 간직하며
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작가는 후자의 관점에서 세 번째
만남을 깊이 후회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자책 속에는 아름다운 인연의 아껴둠, 혹은 남겨둠의 미학이 깔려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전쟁담론으로 파괴된 인연담론을 주체화한다. 그
리고 아름다운 인연을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한국적 정情
의 미학임을 깨닫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 <인연>에서 펼쳐 보인
절제와 격조는 그의 수필론이 도달한 멋의 미학의 한 차원을 열고 있다.
수필 쓰기가 자기체험에 대한 변증법적, 혹은 자기 성찰적 깨달음의 과
정이라면, 그 깨달음 속에서 되찾은 한국적 정情의 미학은 이 작품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게 한다.
   피천득의 <인연>은 한국 현대수필의 미학적 위상을 보여준 상징적
텍스트이다.

 

 

안성수  ------------------------------------------------------------------------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문학박사.
문학평론가(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