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희님의 수필을 『수필과 비평』에서 소개합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천명을 느껴보세요.
천명
팻말에 이력이 적혀 있는 거 보셨죠. 놀랍나 봐요. 모두들 탄성을 지르
네요. 그럴밖에요. 나이가 이천 살이 넘으니까요. 참 예가 멕시코의 산
크리스토발 교외라나요. 작은 성당 앞이랍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종일 이렇게 붐빕니다. 오늘이라고 다르겠어요. 왁자지껄 요란합니다.
휴대폰 소리며 자동차 경적에 경기가 나려 하네요. 나를 배경으로 카메
라에 포즈를 담느라 수선스럽고요. 우르르 빠져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
이 몰려듭니다. 그들 역시 잠시 나를 바라보다 흩어져 가겠지요. 내 겉모
습에 감탄하고요.
하긴 외모야 출중하지요. 세월값을 하는가 봐요. 키는 목을 젖히고
올려다보아도 아득하고 사오십이 넘는 이들이 양팔을 벌려 안아야 제
품을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람한 둥치에 섬세한 줄기가 묘하게
어울린대요. 푸른 잎들의 청정함엔 신성한 기운까지 감돈다나요. 땅을
향해 휘어진 가지의 신묘함에 경탄까지 하네요.
어떤가요. 내 몸통 군데군데 상흔처럼 박인 옹이들은요. 험상궂지요.
둘레가 일 미터가 넘는 것도 많아요. 겪은 풍상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비바람뿐이었을까요. 지진도 겪었고요. 전쟁의 말발굽에
쓰러지기도 했답니다. 긴 장마에 어린것들이 많이도 쓸려갔지요. 뙤약
볕에 말라져간 놈들은 또 어쩌고요. 세월의 고비를 돌 때마다 힘겨웠습
니다. 질긴 목숨입니다. 참척을 그리 겪으면서도 일어서야 했으니까요.
하긴 옹이 없는 삶이 있을라고요. 보이기 싫은데 지워지질 않네요.
만져보세요. 내 몸통은 이미 돌기둥이 되었답니다. 칼끝으로도 쉽게
헤집을 수 없을 거예요. 연한 육질로야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바위처럼
살았으니까요. 땅밖으로 돌출한 뿌리도 마찬가지죠. 어찌나 밟히고 밟
혔는지 감각조차 잃은 지 오래랍니다. 톱질까지 당했으니까요. 다져지
고 아물려 돌이 된 세월이랍니다.
보셨죠. 내 몸에 터를 잡고 사는 새들이 수백 마리인 걸요. 작은 벌레
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거구요.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키우며 살아가잖
습니까. 물론 아프지요. 어찌나 부리로 조아대는지 생살 뜯기는 고통이
죠. 하나 얼마나 살가운지요. 오순도순 살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답니다. 어찌 피붙이 살붙이가 아니겠습니까. 외
로움도 괴로움도 잠시 잊게 해 주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내 육즙으로 살아가는 식물들은 무슨 재주로 다 헤
아리겠습니까. 기생식물이라고요. 아니요. 그저 나를 밑거름으로 사는
자손들이라 해 두지요. 양부모의 보살핌으로 목숨 부지한다면 되겠네
요. 그렇게 함께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떼어내 말라죽게 한답니다. 주사
를 놓아주며 상처 부위에 콘크리트까지 하네요. 질긴 목숨을 연장시키
려고요. 이 무슨 억지란 말입니까. 청춘을 죽여 노수가 살다니요. 망령
이 아니고야 달가울 리 없지요.
방문객들도 다를 게 없어요. 천수가 부럽다나요. 비결이 뭐냐, 묘약은
있느냐, 물어대서 귀찮을 지경입니다. 아니 존경한대요. 지폐며 엽서에
도 박아 놓고 추켜세웁니다. 아니 영원히 살아야 한다고 하네요. 내게
와 마음을 풀며 쉬어 가던 친구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지요. 벗들이
구경꾼들 등살에 물러섰나 봅니다.
볕을 쬐며, 달빛에 젖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지요. 고요한 곳이
었으니까요. 세상 만물과 다 소통했죠. 심한 비바람조차 반기며 살았네
요. 무료함을 덜어 주었으니까요. 아니요. 구름, 바람 좇아 가고픈 데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갈 수 없는 곳을
그리며 그런 시간들을 즐기며 산 겁니다. 나를 찾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위로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징하네요. 사람들이 너무 찾아옵니다.
주변의 혼잡에 상상은커녕 생각조차 바로 세우지 못한답니다. 소란과
소음과 공해 속에서는 숨쉬기조차 어렵지요. 나와 함께 휴식과 사색과
소통을 나누던 사람들은 전설이 되었나 봅니다. 인간들의 문명이 꿈들
을 앗아갔습니다. 주변의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 사진기와 비
디오촬영기, 손전화기, 자동차들이 내 영혼을 지치게 하네요. 혼란스럽
습니다. 옛날의 적요함이 마냥 그립네요.
긴 세월 견뎠는데 남은 시간은 또 얼마랍니까. 서 있는 것도 진력이
날만 하잖아요. 막아서지 마세요. 흙으로 가야지요. 연명하고 싶지 않아
요. 정말입니다. 영생을 꿈꾸라고요. 천만에요. 그건 형벌입니다. 적당
한 때라야 순리지요. 혼자 남겨진 설움 그만 접을래요. 천명일지라도
거역해야겠습니다. 이제 적막에 잠기고 싶습니다.
윤석희 ----------------------------------------------------------------------
2002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이어라≫, ≪찌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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