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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수필행] 객이 머물던 그 산방 - 김광영

신아미디어 2012. 7. 3. 18:24

수필을 읽다보니 이제 수필이 한편의 멋진 그림처럼 보이네요, 글이 그림이 되는 경험.. 행복합니다.

 

 

 

객이 머물던 그 산방


   쇠락한 절이어서일까. 돌담 아래 핀 망초와 제비꽃마저도 애잔하다.
절을 에워싼 솔숲도 곤궁한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 어쩌면 하나같이
여위고 등이 굽었는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엔 문풍지 떠는 소리
와 마룻장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적요를 밀어낸다. 주불 뒤에 해묵은 탱
화는 버거운 세월을 버티고 있고, 흘러내린 촛농은 동굴 속의 종유석
마냥 굳어버렸다. 빛바랜 조화 다발 아래 젊은 여인의 영정사진이 가슴
을 치게 한다. 어린 자식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단 말인가! 녹슨 다기그
릇과 투박한 마룻장도 젊은 영가 때문에 더욱 암울하게 보인다.
   천등산 꼭대기에서 홀로 절을 지킨다는 스님 이야기를 듣고 벼랑 끝
에 매달린 작은 암자이거니 했다. 한데 와서 보니 건물은 낡고 초라하지
만 원통전을 모신 법당과 해묵은 문루가 예사롭지 않다. 어쩌다 초파일
을 그냥 보낸 지인이 연등 달러 가는데 따라나선 걸음이다. 들었던 대로
스님은 설악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오월의 맑은 햇살만 법당을 지키고
있다.
   절 앞에 세워진 석판을 보니 신라 신문왕 때 능인대사가 세웠다는 천
년고찰이다. 초창기엔 흥국사라 불렀지만 조선시대 눈병이 창궐하여 맹
사성이 비보사찰로 이름을 바꾸어 개목사라 불리어졌다 한다. 의와 절
개의 표상인 고려 충신 포은도 이 절에서 십여 년간 학문을 닦았다니
도반을 따라나선 길이 보물을 만난 셈이다. 하지만 같은 천등산 정기를
품은 봉정사엔 파란 눈의 영국여왕까지 찾아와 생일잔치를 벌였다는데
여기는 왜 이리 적막하고 초라한지. 차라리 흥국사로 그냥 두었더라면
이름 덕이라도 보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젊은 영가를
차마 보지 못해 문루에 나앉았더니 서까래를 감싸던 흙덩이가 어깨를
툭 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하소연인가.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만하면 할 일을 다했으니 걱정 말라’고 속말을 전했다.
   경내를 둘러 볼 겸 뜰을 걷자니 조각보 같은 텃밭에서 잡초에 짓눌린
푸성귀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흥부네 자식처럼 조랑조랑 매달린 방울
토마토며, 상치와 쑥갓, 봄배추들이 기세에 짓눌려 얼굴이 해쓱하다. 그
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미를 들고 밭고랑에 엎드렸다. 나름
대로 한 세력 떨쳐보자는 질긴 잡초들을 뽑아내기란 마음만큼 쉽지 않
다. 잡초와의 싸움이 아닌 내 안의 사악한 욕심들을 들어내는 심정으로
씨름하다보니 어느새 남새들이 기를 펴고 방실거린다. 내친김에 먼지
덮어쓴 정독대도 닦아주고 축담 위에 놓인 화초에도 물을 뿌렸더니 솔
바람이 슬쩍 귀밑머리를 걷어 주고 간다.
   사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등산객이 정작 카메라는 툇마루에 두고
물만 먹고 가버렸다. 한참 뒤 카메라에 담긴 추억들이 울상이 될 때쯤
주인이 헐레벌떡 오더니 물건을 챙겨들기 바쁘게 사라진다. 잠시 부처
님 앞에 목례라도 하고 가면 좋으련만. 동동거리며 내려가는 뒷모습이
어제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덧 산사에 어둠이 밀려든다. 졸고 있는 외등마다 불을 밝히고 스
님을 기다린다. 아무리 억척스런 아낙들이지만 사방에 에워싼 숲속에서
까만 사물이 꿈틀대며 나올 것 같아 으스스하다. 한낮에 재재거리던 산
새와 풀벌레들은 모두 둥지로 깃들고 가끔 연밭에서 꽈르륵!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만이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그녀도 내심 두려운지
숟가락을 문고리에 걸고는 피식 웃는다. 들창문으로 들어오는 오월 보
름달빛에 마음을 빼앗겨 보지만 무서움은 좀체 가시지 않는다. 사람이
절을 지키는지, 절이 사람을 지키는지 모를 일이다.
   투박하게 울어대던 개구리 소리가 잦아들 즈음 앞산모롱이에 헤드라
이트 불빛이 일렁인다. 사람이 이렇게 반갑다니! 주객이 전도되어 뛰어
나갔더니 스님 역시 환하게 뜰을 밝혀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길손이 반
가웠던 모양이다. 얼른 시원한 수박 한 쟁반을 썰어냈더니 나들이에 지
친 기색도 없이 허름한 오디오에 산방한담가락을 흥건하게 풀어놓고 다
기에 찻물을 올린다.


   꽃이 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
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 법정스님<산방한담> 중에서

 

   달빛을 타고 춤추는 소리들이 천년고찰을 뒤흔든다. 온갖 슬픔과 생
의 절규가 부질없다는 듯 피리와 퉁소 소리를 타고 밤하늘에 흩어진다.

 

 

김광영  ---------------------------------------------------------------------
2005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