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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술과 아버지 - 김기숙

신아미디어 2012. 6. 26. 16:04

술을 먹는 것이 좋을까요, 먹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술과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 술을 못 끊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놓지 못하고
속이 새카맣게 타서 사셨다. 술이 그렇게도 맛이 있었을까?
   “애주가 여러분! 술은 어떤 맛입니까? 대답 좀 해 보슈. 여러분들도
술을 잡수시면 울 아버지와 똑같이 연극을 합니까?”
   아버지가 술 잡수시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 1인 5역이란 연극을 하십
니다. 관객은 동생과 그 아래 두 살 터울로 다섯 명이 더 있습니다. 어머
니는 배역이 아닌 배역으로 집둘레를 돌다가, 방에 앉아 있다가 아버지
의 느닷없는 부탁에 생솔 가지를 때서 술국도 끓입니다. 아버지의 연극
은 리허설이 없는 연극입니다.
   아버지의 연극 일 막이 얼추 끝이 날 때면 관객은 각자가 쭈그리고
잠이 듭니다. 아버지도 연극 하시느라고 힘이 빠졌는지 옷을 풀어 헤치
고 스르르 쪽마루에서 잠이 듭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술을 한 잔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
님은 반주로 한 잔씩만 챙겨서 잡수셨다. 참 다행이었다. 아들 녀석 하나
두었는데 아들도 도통 술 먹을 줄을 모른다. 아들 녀석이 군인을 마치고
돈을 벌겠다고 사회로 가면서 첫 마디 하는 소리가 “나는 사회에 나가면
술을 먹을꺼유.” 한다. “왜? 이유가 뭔데?” 하니까 “아버지는 술을 안 잡
수셔서 큰사람이 안 되었잖유.” 한다. “그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니까
너는 큰사람이 되어 봐.” 아들이 보기에는 술 먹는 사람이 좋아 보였나
보다.
   이웃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아들은 직장을 따라 시내로 이
사를 갔다. 빈집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다가 나가고, 여러
사람들이 들고 나기를 몇 번 하더니 나중에는 쓰레기만 잔뜩 쟁여 놓고
아주 나가 버렸다. 대문도 부서지고 안마당과 마당은 풀이 수북이 쌓여
서 발 디딜 틈도 없다. 하루는 큰맘 먹고 풀을 헤쳐 가면서 창고를 들여
다보았다.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잔치가 나면 쓰던 그릇들이 눈비 맞고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노란 양은 주전자는 짝을 잃지 않으려고 끈
으로 묶여 뒤엉켜 있었다.
   저 끈이 무엇이기에 어머니는 아버지 끈을 놓지 못하고 김씨 가문에
서 묶여 살았을까? 그까짓 거 한 몸 훌쩍 떠나면 될 것을……. 묶은 끈보
다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끈, 연결고리인 자식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인의 뜻대로 한 건 아니지만, 당신 자리를 남의 여자에게 내어 주고
우리 집으로 둥지를 다시 옮긴 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는 평생 말씀 한번
크게 못하시고 울음조차 삼켜야만 했던 작은 새였다.
   옛날에는 잔칫날 술 담는 주전자를 한꺼번에 장만하기 버거우니까 주
전자를 빌리러 다녔다. 저 주전자로 우리 아버지는 술을 얼마큼 잡수셨
을까? 주전자 너희들 때문에 울 엄마는 속이 새까맣게 탔지 뭐냐?
   먼지를 쓰고, 찌그러진 주전자들이 저마다 옛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
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술만 좋아하신 것이 아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한 학자이
셨다. 오빠들은 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다 서당을 차려 놓고 학교에 못간
학생들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시조 잘 읊으시고 훤칠한 키에 유머가
풍부해 식구들은 물론 남들까지 항상 웃겼다. 동네 초상이 나면 축과
만장 쓰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마루에 천을 길게 늘어놓고 만장을
쓰면 어린 나는 아버지의 글을 읽어 보았다. 찌그러진 주전자 상처 너머
로 세월이 가고, 그 상처처럼 한을 품고 사시던 어머니도 가셨다.
   “아버지! 하늘나라에도 술이 있나요?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아버지한
테 안 가시겠다고 했는데 우리들이 같이 모셨어요. 그곳에서라도 잘해
드려요.”

 


김기숙  ---------------------------------------------------------------------
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