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배우라고 한다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떠한 연습을 하고 있었는가?
에세이 모노드라마
백지는 텅 빈 무대다.
작가는 종이 위에서 연출자이고 모노드라마의 배우이다. 백지 위의 공
연은 몇 백 회를 넘어도 막이 올라가면 심장이 멎는 듯하다. 배우는 관객
의 마음을 피땀 흘리는 연기 하나로 사로잡아야 한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밝은 조명이 켜지는 순간, 배우는 앞이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
을 응시하는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관객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낀다.
절대고독의 순간이다.
백지 위의 첫줄, 호흡을 맞출 상대역도 연출도 없는 무대에서 첫 동작
을 시작한다. 비어 있는 백지는 거대한 강이고 하나의 문자는 작고 작은
돛도 없는 조각배다. 상처 난 손으로 힘없는 노를 저어 거센 강의 물살을
헤쳐 가야 한다. 물살에 잡혀 강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된 것은 세상에 방관하는 빚을 지지 말고 삶의
핵을 가슴에 안고 뜨겁게 살고 싶은 욕망의 단죄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
을 확인하려는 가장 독한 방법으로 원고지의 칸을 메우는 길을 택한 것
인지도. 그도 아니면 영원히 해갈되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살기 때문일
게다.
얼음 무대 위에서 갈등과 고뇌로 점철된 대사를 읊조리는 햄릿을 보
았다. 리투아니아 극단의 <햄릿> 공연은, 햄릿의 고뇌를 얼음으로 만든
무대장치로 표현했다. 햄릿의 머리 위에는 수정 대신 얼음을 쪼아 조각
으로 만든 샹들리에를 걸어 놓았다. 조명을 받은 얼음이 햄릿의 머리
위로 뚝뚝 녹아 떨어지고 고뇌하는 햄릿의 얼굴에 얼음눈물이 흘렀다.
맨발로 서 있는 발은 시린 단계를 지나 아픔을 느끼는 듯, 한 발씩
들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대사가 러시아어라 알아듣지는 못해도 배우
의 몸짓과 무대 연출은 어느 공연보다 햄릿의 고뇌가 잘 전달되었다.
머리와 발에 전달되는 냉기와 아픔을 참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
는 배우와 참을 수 없는 고뇌를 얼음으로 표현한 연출자의 감각. 예술의
팽팽한 엑스터시를 느꼈다. 예술의 사명은 관객과 독자의 가슴에 파문
을 일으켜야 하는데…. 나의 모습을 살핀다.
수필의 무대 위.
나도 이제 백지의 무대에 나갈 시간이다. 객석 구석에 앉아 자신을
응시한다.
무대 의상은 정결한 손과 피 흘리는 가슴이다. 손을 씻는다. 하얀 비누
거품으로 두 손을 오래도록 비빈다. 물을 될수록 세게 틀고 물방울이 튀는
것을 본다. 물이 살아 움직이고 이야기를 쏟아내는 듯하다. 세상과 나의
이야기,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더 잘 듣기 위해 귀가 얼얼할 때까지 후빈
다. 그다음 의식은 조금씩 정성스럽게 손톱을 깎는다. 너무 짧게 깎아 아
픈 손가락에 밴드를 감는다. 글의 무대에 오르기 전, 의식을 끝낸다.
나를 발견하고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동작을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가슴의 상흔들을 꺼내 살펴보니 모두가 남루하고 빈한하다. 길거
리에 내놓은 비 맞은 이삿짐 같다.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참고해야 할 부분이 들어 있는
책을 찾는다. 한 권, 두 권, 여기저기서 뽑아낸 책이 십여 권 주위에 쌓인
다. 찾던 부분을 잊고, 쓰고자 하는 방향을 잃는다. 책 속의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얽힌다.
기진한 신경을 위로받고 순화와 안정이 필요해, 볼륨을 마음껏 높이
어 음악을 듣는다. 음표들이 춤을 추며 뇌 속 신경을 살며시 감싼다.
멜로디의 울림이 온몸에 전해지며 얼음 발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고통이
조금은 완화된다. 고통의 무풍지대다.
흰 종이의 무대에서 대사를 다시 시작한다.
발음은 정확하게, 관객에게 감정 전달이 잘 되게, 연기는 과장하지 않
고 표정이 자연스럽게. 무대 위의 계율을 머리에 넣어 둔 채 목이 쉬도록
연습을 했는데 실제 공연에서는 서툰 목소리와 몸짓이 나온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면 쓰러지더라도 연극은 계속해야 한다. 배우의 어떤 사정
도 관객은 눈감아 주지 않는다. 부모의 상을 당해도 극본에서 웃어야
하는 장면이면 커다랗게 웃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다.
지우고 몇 번씩 고쳐 써도 단어들은 서로 화합하지 않고 부딪치고 밀
어낸다. 문장은 떠오르지 않고 구성도 거칠어 자주 멈추게 되지만, 약속
된 분량은 채워져야 한다. 거짓된 포장이 통하지 않는 게 인쇄된 작품이
라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진액이 나온다. 투쟁의 몸부림이 끝나고 마
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 컴퓨터 구석에 자리한 X표를 눌러 출구로
빠져나온다.
객석의 불이 켜지고 막이 내린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작가메모
수필 쓰기를 아직 즐기지 못한다. 수필의 길은 험하고 멀어 종착지가 보이지
않아 나는 출발점에서 항상 쩔쩔맨다. 그 방황하는 과정이 <에세이 모노드라
마>다.
작품 마감을 앞두고 <햄릿>을 보았다.
세 시간 넘게 리투아니아어로 공연되는 <햄릿>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공
연보다 강한 울림을 주었다. 독보적 연출가의 뛰어난 솜씨는 공연감상의 희열
을 안겨주었고, 전례가 없는 방법으로 보여준 얼음 무대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오백여 년 동안 공연된 고전을 처음 무대인 듯 재해석하였고,
햄릿 역은 록 가수가 처음 연극을 하는 배우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록 스피릿이
느껴지게 토해내듯 감정을 전달했다.
지금까지 공연된 것과 전혀 다른 <햄릿>을 보고 와서 쓰던 수필을 완성하려
고 컴퓨터를 열었다. <햄릿>의 잔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창작의 위대함과
명작의 희열을 목격한 눈으로 컴퓨터 화면에 비친 언어의 빈곤함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절망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백지의 무대에는 조연도 엑스트라
도 없다. 홀로 모노드라마를 연기해야 한다. 배우들이 공연하기에 가장 어렵다
는 모노드라마. 첫 줄부터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까지 공연은 계속해야 하고
막은 내려오지 않는다. 수필 무대 위에서 주어진 역할은 어차피 모노드라마의
주연배우다.
어쩌면 작고 큰일에 마지막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는 인생 하루하루가 글로
쓰면 에세이 모노드라마 아닐까.
조재은 -----------------------------------------------------------------------------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현대수필≫ 등단. ≪월간문학≫ 편집위원 역임.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 (현) ≪현대수필≫ 주간.
작품집: ≪시선과 울림≫(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하늘이 넒은곳≫, ≪삶, 지금은 상영중≫, ≪새롭고 가장 오래된 주제≫,
≪도심 속 오아시스에 가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촌감단상] 가침박달꽃 그늘 아래서 - 김영심 (0) | 2012.06.19 |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촌감단상] 그녀의 기도 - 김연분 (0) | 2012.06.19 |
| [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권두수필] 어떤 실패한 수필가의 몽상夢想 - 전병훈 (0) | 2012.06.18 |
| [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기획특집-다문화와 디아스포라] 같이 울어 주는 마음 - 장미영 (0) | 2012.06.12 |
| [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월평] 감성의 논리 - 유한근 (0) | 201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