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이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는 바로 그 생각, 실천을 전병훈님이 이야기하고 계시네요. 수필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수필문학의 유토피아를 꿈꾸어 봅니다.
어떤 실패한 수필가의 몽상夢想
그는 요즘 깊은 회의와 시름에 빠져있다. 섣불리 맺은 수필과의 인연
이 파경에 이른 것이다. 연인의 거짓을 깨닫고 첫사랑의 환상이 깨어지
는 순간에 겪는 실연의 울분만큼 몸과 마음이 몹시 아프다. 서사나 서정
을 노래하는 수필을 가까이하면 사색의 뜰에 윤기가 흐르고, 삶의 지혜
는 넓혀지려니 했던 애초의 기대가 어림없는 허욕이었나 보다. 문학이
라는 가면을 쓴 지나친 상업적 행태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실종된 독선과 아집 앞에서 갈등은 증폭되고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처음부터 그는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거나 문학에 대한 체계적 수련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기껏 전공분야 활동의 틈새에서 자투리 시간을 독
서로 할애한 것이 전부이다. 준비나 노력이 태부족하니 문학 앞에서는
늘 위축되곤 했다. 해서 스스로 문외한 또는 국외자로 치부하면서 전업
문인들에 존경을 표하며, 그들의 글을 즐겨왔다. 어쩌다 문인의 말석에
합류하면서부터는 최소한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
기도 했다. 한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하더니 기껏 ‘서당 개’
행세하기에조차 힘겨운 그에게 나쁜 버릇이 생겼다. 주제넘게도 그는
수필을 편식하려 든다. 가식적 미문보다는 행간에서 삶의 진실이 숨 쉬
는 진솔한 글을 찾는다. 탁월한 문학적 기법을 갖추었더라도 거짓임이
드러나거나 작자의 언행이나 생활이 글과 일치하지 않는 문학적 기교로
허위를 포장한 것임이 판명 나면 글쓴이의 사회적 경륜이나 명성과 상
관없이 밀쳐낸다.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 애완견과 함께 공원길을 거닌다. 공기는 상
큼하고 하늘에는 그림 무늬가 아름답게 흐른다. 대지는 눈부신 연초록
바탕 위에 다투어 피어난 봄꽃의 향연이 오감을 간질인다. 오랜만에 자
연이 펼치는 청정한 한 편의 수필에 푹 빠져든다. 애견도 신이 났는지
앞서가며 목줄을 팽팽히 당긴다. ‘개보다도 못한 놈이지!’ 바람결에 실려
온 행인들의 주고받는 귓속말에 포근한 단꿈은 쨍그랑 산산조각이다.
무의식중에 목줄을 휙 당겨 개를 뒤로한 채 한참을 걷는다. ‘개보다 더한
놈이라’ 핀잔한다. 해서 개와 나란히 걸었더니 그제야 겨우 ‘개 같은 놈’
이란다. 그의 수필인생은 어떠한가. 그는 진정 ‘수필가 같은 놈’으로 살
고 싶었다. 홀로 가는 수필산책의 길이 외롭고 힘들 때면 과연 누구와
함께 걸으면 진정한 수필가가 될 수 있을까.
진실을 얘기하는 문학이라는 데 매료되었던 그는 진실이 매도되고,
글쓴이의 언행이 어긋지고, 가슴을 떠난 머리로 쓰는 글이 넘치는 작금
의 문단 풍토에서 열정이 서서히 식어만 간다. 글만큼이나 따뜻하게 느
꼈던 문인들에게서 비정하고 잔인한 모습을 본다. 줏대나 소신 없이 명
리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명분 없는 대리전 앞잡이로 음해, 비난을
일삼는 행태에 실망한다. 정치적 성향의 표출이나 노사투쟁을 방불케
하는 행위며 개인적 이해에 따라 진과 위를 뒤집고, 맹목적으로 추종하
는 군상, 허위 날조하는 거짓말 막말의 언어폭력 앞에 천성이 나약한
그는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한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은퇴연령이 낮아지면서 요즘 최적의 인생 이
모작으로 문학에 대한 수요가 호기를 맞고 있는 성싶다. 더욱이 지금의
대부분 고령자는 가난과 전쟁을 겪은 생존의 한계지대에서 헐벗고 허덕
이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압축고도성장의 주역으로 또는 자식에게는
가난이나 역경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본능적 과욕에서 나를 버린
채 개인적인 삶을 통째 희생하였다. 늦게나마 잃어버린 자기의 삶을 되
찾고 숨은 재능을 꽃피우려는 절박감에서 문학을 찾고, 예술을 즐기려
는 열정이 가수요로까지 번지고 있는 성싶다. 수요 있는 곳에는 공급이
따르거늘 이에 질세라 수필가를 배출하는 양산체제量産體制가 갖추어지
면서 수필의 시대가 왔다고들 환영하는 것 같다. 한데 수필가나 문인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을 학습하는 곳이나 인생의 거울이 될 문학의 참스승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세속적 이해나 타산에 밝은 선생은 넘치나 진정한
스승은 없고, 수강생은 가는 곳마다 만원이나 진정한 제자는 없는 오늘
의 세태 앞에서 문단이나 수필계만 유독 순수하고 지조와 품위 있기를
주문하는 것은 지나친 결벽일 테지. 그러나 개별 작가의 사명이나 임무
가 ‘흘러넘치는 탁류에 맑은 물 한 바가지 붓는 일’이라면 최소한 흙탕물
을 붓는 일만은 없었으면 싶다. 양과 질이 비례하지 않음은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문학작품이나 문인의 양산으로 인한 사회적 역기능이
문학의 순기능을 구축하는 현상은 없어야 할 텐데….
같은 진영陣營이면 불법도 감싸거나 침묵하는 반면, 다른 진영이면 똑
같은 행위를 무조건 악으로 모는 진영논리가 팽배하는 세태라 할지라도
교육은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가르치고, 도덕적 심성과 행동을 일깨워
야 한다. 교육자에게 다른 직업과는 유별히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
도 이 때문이리라.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인간의 궁극적 추구가 행복한 삶이라면 인문학의 지향점은 이를 충족
시켜주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일 터다. 문학 특히 수필의 순기능은
인간성의 회복이나 정서의 순화를 통하여 윤택한 삶의 방식에 북을 돋
우는 것이 아니던가. 문학이나 문인이 극단적인 상업화 정치화로 세속
적인 타락을 거듭하고, 거짓말과 상호불신, 파벌의 확대재생산, 문학의
정치도구화 등으로 오염되고 더욱이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급속히 확
산·증폭되는 상황에서 과연 수필문학이나 문단의 정상적인 발전을 기
대할 수 있을까.
문인은 글 쓰는 재능을 타고난 만큼 기묘하게 거짓을 꾸미고 음해하
는 재주 또한 탁월하다. 해서 특정개인의 대리전 양상을 띠거나 집단적
편 가르기에서 진과 위가 뒤집히는 경우 음해나 모함을 당하는 사람은
정신적·신체적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 피해나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한 사람의 정의가 불특정 다수의 불의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다. 해서 문학에서의 ‘악화惡貨에 의한 양화良貨의 구축驅逐 현상’
은 경제현상에 못지않게 심각하다.
문학적 장치나 기교의 탈을 쓴 허위의 수필에 독자들이 기만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싶다. 수필이 나와 너를 편 가르는 씨앗이 되거나 음해의
늪이 되어서도 안 되겠다. 문인에게서만이라도 자기 이속 챙기려 남의
가슴에 아린 멍을 안기는 행위만이라도 없었으면 한다. 익명성 뒤에 숨
어 수필의 진실성을 해치거나 익명에 의한 무책임한 여론 형성에 가담
하는 ‘사이버 테러’나 선동적 인터넷 여론 폐해가 태동도 하지 않은 지난
날 순수 아날로그 방식의 문학세계에서 풍겨주던 운치가 새삼 그립기만
하다. 수필 한 편이면 각박한 세파에 지친 영혼이 생기를 찾고, 삶에
시달린 심신에 새 움이 돋아나던 시절이었지. 진정 수필문학의 유토피
아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신기루이런가.
전병훈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경영학 박사, 공인회계사, 수필가.
고려대학교 부총장, 극동정보대학 학장 역임.
수필집: ≪동행≫, ≪나의 삶 나의 인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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