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면 평사리 들녘의 허수아비를 보면서 겉모습은 변해도 마음만은 그 옛날 허수아비를 닮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꿈꿔본다. 평사리 들판 허수아비 어깨 위에 노을빛이 내려앉는다."
허수아비의 꿈 - 김미숙
하동 평사리 들판에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은 맑은 공기와 물, 바람과 햇볕이라는 자연 세탁기에 얼룩진 때를 씻고 방금 건조하여 보송보송한 연노랑 이불을 드넓게 펼쳐 놓았다.
황금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섶엔 다양한 생김새의 허수아비들이 줄지어 서있다. 요즘 농촌에서도 허수아비 보기가 어려운데 평사리 들녘에서 뜻밖에 이들을 보니 보고 싶은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드론으로 농약을 치는 시대가 되었으니 허수아비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허수아비 축제를 한 후 너른 들판 곳곳에 이들을 전시해 놓은 모양이다. 허수할아버지 할머니, 허수아비 어미, 허수아들 딸 등 허수아비 가족들이 각양각색의 차림으로 가을을 노래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옛날의 허수아비는 곡식을 해치는 새와 짐승을 쫓기 위해 논밭에 세워두었다. 열십자 모양 막대기에 짚을 감고, 천을 둘둘 말아 뭉쳐 얼굴을 만들어 붙인 후 허름한 옷을 입히고 밀짚모자를 씌워 놓는다. 그러면 벼를 쪼아먹으려던 머리 나쁜 새와 짐승이 사람으로 착각하여 논밭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허수아비는 바쁜 농촌에 한몫을 톡톡히 하며 곡식을 영글게 하는 듬직한 일꾼이자 파수꾼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 서막이 열리면 허수아비의 고달픈 삶이 시작된다. 하루 종일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여물어가는 곡식을 지켜야 한다. 한낮의 따가운 가을볕이 내리쬐는 날은 온몸에 땀이 배고, 폭풍우 몰아치는 날은 벼 거스러미가 얼굴을 때리고 찔러댄다. 땅거미가 지고 칠흑 같은 밤이 되면 허름한 옷가지 사이로 서늘한 바람과 찬 서리가 뼛속을 파고든다.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과 서글픔에 소리 없이 눈물지으며 하루, 이틀, 사흘, 한 달을 버텨내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낟알이 온전한 알곡이 되었을 때쯤이면 허수아비는 팔이 부러지고 누더기가 된 옷차림과 몸뚱이로 작은 바람만 불어도 훅,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다.
겨울의 서막, 풍성한 수확을 안겨드린 주인집에서 고단한 몸을 뉘고 편히 쉬며 안락한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 여름을 지나 새 옷을 갈아입고 다시 가을 들판에 서는 꿈을 꾼다. 그러나 허접한 몸을 가눌 새도 없이 모진 바람이 들이닥친다. 추수를 끝낸 농부의 마음속에 허수아비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들판에 홀로 남은 허수아비는 이제 제 한 몸 버텨내기도 힘겨워 나날이 기울어져간다. 부서진 몸과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지난 가을의 튼실한 알곡을 지켜낸 자신을 대견해 하며 내년을 기대한다.
어머니도 허수아비처럼 밤낮없이 일만 하셨다. 여물지 못한 자식 낟알들을 가꾸고 영글게 하려고 새벽부터 밤까지 밭일에 집안일에 장사까지 하며 거센 풍파를 견뎌내었다. 당신은 허수아비 옷을 입고 비바람과 서리를 맞으면서도 여섯 알곡을 단단히 품었다. 곳곳에 호시탐탐 알곡을 노리는 위험으로부터 온전히 지켜내며 강철같이 살아오셨다. 그 자부심과 온기도 잠시, 이삭이 된 한 톨의 알곡을 가슴에 묻으며 쓰라린 고통에 고추 눈물 흘린 날이 얼마던가. 마디마디 쑤시는 팔 다리와 물기 없이 푸석거리는 몸뚱아리조차 가눌 길 없음에도 오로지 자식 잘되기만을 빌고 또 빈다. 이제 자식을 지키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당신의 알곡인 건강과 행복을 지키며 따뜻하고 안락한 겨울을 보내기를 바라본다.
걸음을 옮겨 들판 입구 공터에 멈췄다. 풍년을 자축하는 잔치를 하는 양 둥글게 모여 춤추는 허수아비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낡고 허름한 옷을 기워 입은 것은 하나도 없다. 청바지에 스웨터, 예쁜 원피스를 입은 꼬마 허수아비, 등산복에 모자를 쓰고 있는 허수아저씨 아줌마, 알록달록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허수아비 가족도 있다. 얼굴엔 미소가 한 가득이다.
연노랑 카펫이 황금 이불이 되면 농부의 손길이 바빠지고 황금물결 넘실대던 평사리 들판에도 스산한 바람이 불겠지. 하지만 허수아비는 혼자가 아니기에 외롭지 않다. 가족과 친구가 있어 기쁨도 슬픔도 나누고 힘들고 지칠 때 함께하면서 서로의 허수아비가 되어 준다면 혹한의 계절을 꿋꿋이 이겨내고 겨울바람 따위에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악양면 평사리 들녘의 허수아비를 보면서 겉모습은 변해도 마음만은 그 옛날 허수아비를 닮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꿈꿔본다.
평사리 들판 허수아비 어깨 위에 노을빛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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