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매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믿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응원의 말이 들어있다. 가족을 위해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할머니란 호칭이 아직 귀에 낯설고, 아주머니라는 말을 자주 들을 때면 스스로 자신을 반추해 보아야 할 때라 생각해 본다."
아지매 - 김덕조
찬거리를 준비하려고 마트로 자주 간다. 대형마트를 돌다가 이웃 새댁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던 새댁이 말을 멈추고 달려간다. 야채코너에서 깜짝 세일 한다는 방송을 들었다. 언제 왔는지 덩치 큰 아줌마들이 비좁도록 모여들었다. 그 틈새를 헤집고 들어간다. 뭘 사려나 했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들고 나오며 씨익 웃는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야들야들한 호박 한 개를 건졌다며 흔들어 보인다. 새댁이 하는 양을 보니 옛날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묻어난다.
아줌마들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파란불 신호를 못 기다린다. 4차선 도로쯤은 한달음에 달려 건너기도 한다. 또 버스 속에서 잇속을 다 드러내 보이며 하품하는 아줌마도 있다. 누가 곁에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공공장소에서도 할 건 다하는 제일 마음 편한 사람이지 싶었다.
내가 아가씨 적에는 신호를 무시하면 당장 경찰차에 실려 가는 줄 알았다. 하기야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자를 들고 기다리는 경찰에게 걸리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경찰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호랑이 같은 우리 아버지 눈에 걸리지 않는 것이 급선무였다. 치마를 골반에 걸쳐 입으면 허벅지까지는 안 보인다.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 걸리는 날이면 당장 바지 입고 나가라고 호통을 칠 것이다. 용케 대문을 나서면서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찔할 만큼 짧은 치마를 입어도 누가 나무라지도 간섭하지도 못하는 세태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서슴없이 할머니라 부른다. 그러나 할머니 당신도 보는 눈은 있다. 그대도 머지않아 할머니 소리를 듣겠구만, 하는 속말을 한다. 당신 딸보다 더 나이 든 사람한테서 할머니란 말을 듣는 것은 거북스럽다. 유모차에 의지해야 다닐 수 있는 정도라면 할머니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까! 흔히들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이모라는 호칭도 친근감이 묻어나서 좋지만, 지긋한 나이에는 아주머니가 좋은 것 같다. 아주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는 아지매이다.
부산에는 자갈치아지매가 있다. 자갈치시장 생선가게에 내가 아는 그녀가 있다. 젊었을 적에 휘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같이 하기도 한 이 사람은 언제부터인지 자갈치아지매가 되었다.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많이 놀랐다. “어떻게 된 거냐?” 고 묻는 말에 “그렇게 됐다.”고 뜻 모를 말을 하고는 싱긋 웃는다. 혼자가 된 것도 몰랐다며 내가 미안해했다. 갈치를 진짜 제주산이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그때 듣기로는 아들은 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딸은 한의대를 다닌다고 했었다. ‘복도 많지, 두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면 그렇게 어렵다는 한의대를 가냐.’면서 모두들 부러워했다. ‘자식을 너무 잘 키우면 빨리 남이 된다.’ 며 시새움을 표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다 자식 나름이다!” 하고 담담해하던 사람이다.
어떤 마음고생이 있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텅 빈 듯했다는 그 마음을 자갈치시장에서 찾았다니 잘 생각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자갈치시장에서는 딴 생각 할 겨를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돈단다. 토박이 형님들의 인정 뚝뚝 묻어나는 입담으로 늘 웃고, 같이 어울리니 생기를 느낀다고 했다. 평소의 활달하고 부지런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자갈치아지매 특유의 왕성한 에너지와 잘 맞을 듯하다.
자갈치 시장의 아지매들은 보통 나이 든 아지매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불룩한 돈주머니처럼 그들은 자존심도 대단하다. 자갈치아지매는 세월만 축내는 늙은이로 살기 싫다는 고집도 있다. 자식들을 잘 키워낸 억척스럽도록 부지런한 성격에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추울 때도 더울 때도 자갈치시장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고향의 오촌아주머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부지런한 사람일 것이다. ‘부지런한 물방아는 얼 새도 없다.’란 말을 엄마는 자주 아주머님에게 하는 걸 보았다. 아주머니를 부를 때 우리는 그냥 아지매로 지칭했다. 아버지의 사촌 동생인 오촌아재는 심한 말더듬이었다고 했다. 아재는 심성이 곱고 부지런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발음 교정을 받으러 읍내까지 다니기도 했다는 아재다. 그런 아재에게 용기와 힘을 준 아지매에게 칭찬이 자자했다. 사촌동서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부지런한 물방아가 되리라 맘먹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부유하면 어지간한 흠도 묻혀들기 마련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을 듯하다. 잠시도 쉬지않고 일하는 아지매! 그 곁에 앉으면 땀 냄새가 훅 났지만 그런 아지매가 나는 참 좋았다.
아지매의 집은 동그마니 외따로 있었다. 떨어져 있어 외로웠을 아지매는 머지않아 윗동네의 넓고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지매의 새 집을 보고 내가 부러웠던 것은 뒤란 채마밭 곁에 있는 우물이었다. 깜깜한 우물 속에 대고 ‘아~~’ 하고 소리 지르면 ‘왕~~~’ 하고 돌아오는 울림이 있었다. 우리집에도 없고 숙모 집에도 없는 우물이 아지매 집에는 있었다. 오촌 아지매는 부지런한 물방아와 많이 닮았다.
아지매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믿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응원의 말이 들어있다. 가족을 위해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할머니란 호칭이 아직 귀에 낯설고, 아주머니라는 말을 자주 들을 때면 스스로 자신을 반추해 보아야 할 때라 생각해 본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세상마주보기] 신호등 - 김영채 (0) | 2019.03.21 |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세상마주보기] 허수아비의 꿈 - 김미숙 (0) | 2019.03.20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세상마주보기] 밍글라바 사랑법 - 고미선 (0) | 2019.03.19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세상마주보기] 가슴 - 고대관 (0) | 2019.03.19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사색의 창] 겨울나무 - 좌여순 (0) | 2019.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