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자로서 신호등이 될까. 장승이 될까. 아마 전설 같은 유물로 전락해버린 장승보다 복잡한 도시 속에 보잘것없이 길거리를 지키는 신호등이 되고 싶다."
신호등 - 김영채
계절이 바뀌어도 신호등은 말이 없다. 건널목에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쉴 새 없이 껌벅이는 불빛 따라 파란, 붉은 색상으로 바뀐다. 노란색 불빛을 더한 삼색등은 묵묵히 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어디서 와서, 왜 이곳을 키 큰 수문장처럼 굳게 다문 입으로 버티고 서 있는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차에 따라 이색 불빛을 쏟아낸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불빛을 발산할 때마다 사람들은 색등에 따라 멈추다가 건너간다. 자동차 행렬도 움직임을 멈췄다가 곧 움직인다. 길 위에 나란히 붙어있는 삼색 등은 건널목 이색등과 눈 맞춤으로 붉은, 파란빛으로 교차하며 하루를 열어간다. 색등으로 멈춤과 움직임, 돌아가는 방향에 맞춰 순간순간 색상을 바꾸어가는 신호등은 외롭게 서 있는 안내자이다.
어둠이 내리면 신호등은 진한 색상으로 분장을 한다. 진한 빛으로 오고가는 사람들과 눈 맞춤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보면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이 묻어나는 모습이 즐겁기도 하다. 옆 가로등이 높은 곳에서 어둠을 조용히 밀어내고 소리 없이 새벽이 다가올 무렵, 제법 넓게 가지를 드리운 가로수는 나뭇잎이 흔들릴 때 흥얼흥얼 노래도 부른다. 외로울 때 새록새록 속삭이는 반가운 이웃이다.
어쩌다가 불쑥 나타난 텃새가 머리에 배설물만 남기고 황급히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신호등은 언짢은 기색 없이 아침을 기다린다. 새벽을 여는 사람은 부지런한 청소부다. 인도를 쓸어가는 빗자루가 뚝뚝 스치는 감촉은 어느새 새벽잠을 깨운다. 그리고 아침 등굣길에 어린 학생들이 손을 들고 인사하는 표정은 흐뭇한 기쁨으로 다가온다. 하루는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인사로 다정하게 마주하는가 보다.
신호등이 지켜보는 횡단 길은 돌발사고로 충격을 받기도 한다. 갑자기 급브레이크 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릴 때 접촉사고는 터졌다. 누구인지 자동차에 부딪혀버린 사내는 아스팔트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웅성거리는 행인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이, 사이렌 경적과 함께 달려온 119구급차는 숨 가쁘게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이송해 간다. 핏자국만 아스팔트에 젖어있다. 부상 상태도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이다. 간절히 죽음에 이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도 가슴앓이 앓듯 우울했다.
신호등은 건널목에 서서 시시각각 파란, 붉은 색상으로 바뀌고 있으나, 사람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항상 위험은 순식간에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위험은 곧게 뻗어가는 길, 평행선과 사각으로 잘 가꾸어진 길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길을 따라 건널목마다 신호등은 키 큰 장승처럼 서 있다. 웃음기 머금은 왕방울 같은 눈과 익살스러운 주먹코, 근엄한 체구로 마을 길 어귀에 곧게 서 있는 장승은 친근하고 소박한 지킴이이었다. 그러나 쇠붙이로 만들어진 신호등은 무표정한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로 색등만을 비추는 거리의 주마등같기도 하고, 아니면 건널목을 지키는 낯선 쇠붙이 로봇 장승일까?
어둠 속에서 번갯불을 휘갈기며 천둥이 울어대던 여름밤이었다. 장마가 오락가락하면서 비만 내리는 줄 알았는데, 무섭게 내리치는 벼락 줄기들이 도시를 한동안 마비시켰다. 굉음 터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순간 정전이 되고 신호등이 꺼져버린 도시는 암흑이었다. 폭우 속에 느리게 움직이는 자동차 불빛, 불빛들이 엉켜 어둠 속을 엉금엉금 기어간다. 건널목에 옹기종기 얽혀서서 어쩔 줄 모르고 신호등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불안감에 잠겨있다.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밝아지고 신호등의 파란 색등이 빛을 발할 때, 바삐 길을 건너가는 우산들의 행렬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간다. 내리는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도시는 잠들어가고 있다. 이런 도시 속 건널목마다 반듯이 서 있는 신호등은 외로운 장승처럼 밤을 지키고 있다.
오래전 마을을 지키던 장승은 경계를 표시하고 지나가는 길손에게 가는 방향을 알려주거나 혹시 길을 잃지 않을까, 염려하는 친근한 안내자였다.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어느새 근엄한 수호신이 되어 마을과 사람을 지켜주는 지킴이였다. 이젠 마을과 도로를 따라 장승이 버티고 서 있을 자리에 신호등이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는, 무심코 건널목을 건널 때나 도로를 걸을때마다 순간순간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서 있지 않은가? 혼자 걸어가는 길위에 서서 항시 죽음과 동행해야 하는 나는, 죽음이라는 거울 속에 내 영혼이 어떤 모습으로 투영될까. 과연 죽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럼 인연因緣 따라 무엇이 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영원한 안내자가 되고 싶다.
안내자로서 신호등이 될까. 장승이 될까. 아마 전설 같은 유물로 전락해버린 장승보다 복잡한 도시 속에 보잘것없이 길거리를 지키는 신호등이 되고 싶다. 꿈꾸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현신現身하기 위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진 채 달구어진 쇳물 속에 용해되어 만들어진 쇠붙이들. 이를 잘다루는 어느 장인의 손에 다듬어져 쇠붙이에 동그란 눈동자를 껌벅이는 신호등으로 다시 태어나. 햇볕 들고 바람 불고 비가 오나 눈이 내려도 온종일 길거리에 서서 시시각각 파란. 붉은 색등을 발산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 안내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다. 비록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들과 오감으로 소통하며 밤낮없이 생사生死가 도사리고 있는 건널목에서 웃음 머금은 신호등으로 불빛을 발산하며 묵묵히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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