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글쪼글한 손으로 쌀을 씻어 안치고, 뻣뻣한 손가락을 펴 밥물을 가늠해보는 모습이 처연한데 당신 스스로의 표정은 안온하다. 저 밥이 익으면 너스레 한마디 던지며 오늘 두 번째 아침밥으로 먹어야겠다."
낮달 - 김정태
흰 구름이 엷게 떠 있는 날에 낮달도 거기에 있었다. 떡방아 찧던 토끼는 낮에는 집을 비웠다. 교교하지도 휘영청하지도 않은 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흘러 다녔다. 툇마루에 서서 산 너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낮에 뜬 달을 따라다니시곤 하셨다. 달이 살이 차오르면 흐뭇해하시기도 했다. 쌀밥 담긴 밥사발 같다고 하시며.
두 번째 아침밥을 먹는다. 한 시간 전쯤 아내가 내어준 조반상을 마주했었다. 두 번째 마주한 어머니의 아침밥은 흰 쌀밥이다. 아내가 차리는 식탁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색깔이다. 뜸이 덜 든 밥에서 김이 오르며 쌀밥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밥사발에 찬물을 붓고 후딱 떠 넣는다. 속절없이 사발 안에 번진 뜨거운 눈물도 숟가락 위에 얹혀있다. 정신도 눈도 흐려진 어머니는 자식의 알량한 감정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빠르게 밥사발을 비운다.
달갑지 않은 것이야 매양 같겠지만 하필이면 ‘밥’으로 온 것이 가슴에 모래바람을 일게 한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아내는 해 질 녘쯤 퇴근을 한다. 10여 년 넘게 이어진 일상이다. 며느리의 귀가를 기다리는 눈이 아득해 보였다. 한나절이 조금 기운 시간인데.
“어미 차가 종일 보이지 않는구나.”
뜬금없는 말씀에 먼 산 바라보다 등짝을 후려 맞은 듯 놀랐다. 며칠째 예사롭지 않은 일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먹구름에 가려 낮달조차 보이지 않고 어둑했지만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이었다. 날이 어둑한 것으로 저녁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시간은 대중없이 저녁 밥 짓기로 이어졌다. 이른 저녁밥을 먹었다. 얼마 후 먹구름이 걷히자 어머니에게는 아침이 왔다. 해는 아직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노을만큼 붉어진 눈을 껌뻑거리며 두 번째 저녁밥을 먹었다. 물을 말아 삼켜도 말똥거리는 밥알에 목은 메었다. 아내가 귀가하면 나는 세 번째 저녁 밥상을 어머니의 정성으로 또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은 몇 폭의 정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 한 폭이 툇마루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고 계신 그림이다. 해가 설핏한 인경산이 멀리보이는 마루에 서서, 산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시곤 하셨다. 산허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을 보시고 곧 바람이 불고, 바람은 비를 불러올 것을 예견하셨다. 산봉우리를 가뿐한 걸음으로 넘는 흰 구름을 보시고, 며칠간은 날이 개어 일손이 바빠질 것을 가늠하셨다. 어머니가 산 너머를 바라볼 때 구름은 모양새를 바꿔가며 머무르고, 또 봉우리를 넘어갔다. 먹구름이 짙어지면 낮달도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낮달처럼, 밝지는 않지만 스스로 자신을 내보이던 어머니의 의식 속에 먹구름이 불어왔다. 흐려진 의식 속에 또렷하게 보이는 것 하나가 자식에게 먹일 밥이 될 줄이야. 먹구름 속에서는 밥사발 닮은 낮달조차도 모습을 감추었었는데.
오래전, 전기前期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진 것이 발표되던 날이었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그 맘쯤의 인생을 널어놓다가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등을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꼬르륵’하고 밥 달라는 신호도 뱃속에 조금의 공간이라도 있어야 소리를 내는 모양이다. 조금전 버스 안에서도 민망하게 소리를 내던 뱃속의 항거는 삽짝을 들어설 때는 정작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퀭한 자식의 눈을 보고 어미로서의 맘은 급했다. 부랴부랴 밥을 안치고 아궁이에 잔솔가지를 우겨넣었다. 밥이 잦혀지는 동안 센 불을 끄집어내어 뚝배기를 올려놓으셨다.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을 툭툭 치며 분해 하셨다. 어미 없는 자식처럼 왜 생배를 곯아가며 다니느냐고. 부지깽이 끝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진학시험의 당락 여부를 물어 오길 바랐다. 어머니는 내 간절함은 외면한 채 밥상을 앞에 놓아주셨다. 다만 찔끔거리며 밥을 넘길 때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쿨렁대는 등을 수없이 쓸어내리고 계셨다. 허기진 자식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머니에게 무엇이 있었으랴. 낮에 뜬 반달을 자식을 위해서라면 뚝딱 따올 수 있기라도 하듯, 밥이 미욱한 자식에게 내미는 최선의 사랑인 것을.
타박타박 넘으리라 했던 여든의 고갯마루에서, 산허리에 먹구름 내려앉듯 기억의 끈이 간들거린다. 마지막 잡고 있는 끈 하나에, 흰 구름 사이로 고개 내밀던 낮달을 보고 말씀하셨듯 밥을 안고 계신 것이다. 기억의 끈, 그곳에는 흰 구름과 먹구름이 공존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먹구름 같은 의식속에 잠시 흰 구름이 산을 넘을 때 희미한 낮달은 어머니에게 ‘밥’으로 구체성을 띠는 것이다. 허나 어머니의 두 의식 사이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밥을 줄 대상의 얼굴을 잊지 않고 어머니의 간들거리는 기억의 끈에 오래도록 매달려 있기를 바랄 뿐이다.
때를 거르지 않고 가족을 챙겨 먹이는 것은 어머니 삶의 전부였다. 어머니의 ‘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나는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시늉일망정 ‘엄니 오늘 밥은 더 맛있네.’ 하는 한마디 너스레조차도 거듭 겹쳐지는 밥상 앞에서 아끼고 있는 용렬한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쪼글쪼글한 손으로 쌀을 씻어 안치고, 뻣뻣한 손가락을 펴 밥물을 가늠해보는 모습이 처연한데 당신 스스로의 표정은 안온하다. 저 밥이 익으면 너스레 한마디 던지며 오늘 두 번째 아침밥으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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