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빠르게 대신 여리게의 매력에 빠져보시지 않으시렵니까?
‘p’ 는 여리게
삼십 년 만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레슨에 대한 설렘과 어색함으로 선
생님을 맞이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하농을 치면서 힘이 잔뜩 들어
간 어깨와 팔이 아파왔다. 이게 아닌데……. 왼손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은 오히려 힘이 모자랐고, 각각을 분리하는 감각도 떨어져 음이
미끄러졌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신선한 도전이었다.
어릴 때의 체르니 30번은 그저 연습만 하는, 30번, 40번, 50번, 순서대
로 진도를 나가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숨어
있었다니, 대회를 위한 그냥 연습곡이 아니라 온전한 아름다움을 간직
한 하나의 완성된 곡이었다. 아이일 때의 느낌과 지금 나의 느낌이 이렇
게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당연하지만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쇼팽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내게 춤곡인 마주르카 한 곡을 주셨다. 처
음에는 내가 치는 피아노에 맞추어 춤을 추면 박자가 엉망이 되어 서로
팔이 엉키고 발을 밟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자가 맞춰지고
나도 연주와 함께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 속에서 겪은
많은 일들이 나를 이렇게 성장시킨 거라 생각하며 더 깊게, 더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쉬고 있던 손가락들
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엉뚱한 손가락 번호로 엉성한 화음을
만들어냈고, 쉬운 부분은 빨라지고 어려운 부분은 느려지는 박자에 스
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악보에 표시된 기호 중에 ‘p’ 여리게, ‘f ’는 세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쉽게만 생각했던 ‘여리게’가 잘 되지 않았다. 어깨와 팔로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아 제대로 된 여린 음이 나오지 않았다. 약하게만 치면
음이 선명하지 않았고 정확한 음을 내려고 힘을 주면 여리게는 저만치
가버리고 어느새 큰 소리가 났다. 그랬다, ‘여리게’는 어렵고 오히려 ‘세
게’가 쉬웠다. 마치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것
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처럼.
이렇게 새로운 도전으로 시작된 봄이 어느덧 유월의 초여름이 되었
다. 연둣빛 연한 새잎에서 초록으로, 다시 짙푸른 녹음으로 신천대로의
가로수들이 출근길 내 눈을 행복하게 했다. 그러다 문득 몇 해 전 무주를
다녀오면서 보았던 물오른 나무들이 생각났다. ‘세상에, 정말 발갛다!’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의 끝자락이 물을 머금어 발갛게 반짝였
다. ‘한창 물이 올랐다.’는 말이 이렇게 큰 놀라움을 품은 것인지 미처
몰랐었다. 분명 내 눈은 처음 만나는 광경이었다. 아니 거기에 그렇게
있었는데 내 눈은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그래, 알아야 보인다.’ 강의
중에 자주 하던 말이 내게 다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자연은 그렇게 처음부터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제
야 내 눈은 그걸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이고, 음악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울림을 전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나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얼마나 소중한 삶의 위
로이며 얼마나 감사한 하루하루의 감동인지 출근길 잠깐의 사색으로 내
마음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3 아들에게 자
연은 이렇게 신비롭고 예술은 이처럼 아름다운 울림을 전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출근길 삼십 분이 흘렀다. 주차장
엘 들어서며 문득 ‘그렇지, 아들도 제 몫의 삶을 살아봐야지. 지금까지의
나처럼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기쁨 속에서 또 슬픔 속에서 하루
하루의 몫을 살아내야지만 자신만의 보람과 감동을 얻겠지. 느끼라고
말하지 말고 엄마는 그렇게 느꼈다고만 말해주어야지. 너도 언젠가는
벅찬 감동으로 출근길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푸른 나뭇잎들에 인사하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해주어야지.’ 하는 답이 떠올랐다. 그래, ‘여리게’는 어
렵지만 그 ‘여리게’의 매력으로 음악이 더 조화로워지듯이…….
아, 오늘은 정말이지 기분 좋은 날, 주차장 끝자리에 딱 하나 남은 빈
자리가 내게 싱긋 인사한다.
최은진 ----------------------------------------------------------------------
2011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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