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에서 맡았던 구수한 냄새가 그리운 것은 인생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겠죠.
아! 바로 그 냄새
때 늦은 함박눈이 팔랑거린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에는 백설이 하얀
면사포처럼 씌워져 있다. 달력 표지에 소복이 눈 쌓인 장독대를 보며
장 담글 생각을 해본다. 조상들의 지혜와 혼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는 언
제 봐도 정겹다.
시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된장항아리. 넉넉함을 품으면서
윤기가 흐르는 모양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의 후덕한 모습이다. 제주
에서는 음력 섣달 안에 장을 담가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다른 지역보다
기온의 차가 있기 때문이리라.
십이간지의 동물을 보면서 장 담글 날을 골라본다. 우선은 식구들 띠
가 없는 날을 살폈다. 그것도 우리 고장만의 풍습인지 모르지만. 나름대
로 온순한 동물이라야 된장 맛이 구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토끼(卯)날로
정했다.
된장 담그는 일은 연례행사다. 메줏덩이를 정성스레 띄우고, 장 담글
준비로 천일염도 사들였다. 어느 여류작가는 된장을 오덕마님이라 표현
하셨다. 원심圓心과 항심恒心, 불심佛心, 그리고 선심善心과 화심和心. 그중
에 나는 화심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화심이란, 어떤 음식과도 폭
넓게 어울리는 조화의 성품 때문에, 어쩌면 쭉 고른 메주콩의 속성 때문
에 친화력이 있는 것일까?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날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해질녘 시골마
을, 커다란 팽나무 그림자가 드리우면 강아지들이 꼬리치며 짖어댄다.
초가집 사이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 좋아했던 어린 시절. 밭일 나갔
던 부모님이 돌아오면 서둘러 저녁 짓는 시간은 분주하다. 아궁이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온몸을 녹였던 그 따뜻함. 온 식구가 둥그런 밥상
에 둘러앉아 그릇 당기는 소리, 삶의 경쟁처럼 앞다투어 끌어당겼다.
어릴 적, 친정에는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 경제 작물로 유채를 재배하
고, 보리 수확을 하고 나면 가을걷이 작물로 콩을 파종한다. 떡잎부터
올라온 콩은 파릇파릇 나비가 춤을 추는 듯 이랑을 흔들며 자랐다. 콩밭
에 잡초를 뽑다 점심때가 되면 나무그늘 쉼터를 찾았다. 아기 손바닥
같은 콩잎을 뜯어서 된장에 싸먹으면 밥도둑이 되어 오후의 나른함을
물리쳤다.
늦은 가을에 콩 수확을 하고 타작하는 날이면, 마당 가득 멍석을 펼친
다. 아버지는 도리깨질로 콩을 두들기며 구슬땀을 쓸었다. 언니와 나는
콩단 나르는 일손을 더했다. 타작이 끝나면 어머니는 된장 만들 콩을
제일 먼저 손질한다. 할머니는 쭉정이를 골라내며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콩 튀기듯 잘했다. 정성을 다하여 항아리에 가득 담아놓은 콩알은 반질
반질 고운 황금알이다.
북풍이 불어오면 아버지는 땔감장작을 준비했다. 공동수도 물을 길어
다 항아리 가득 채우는 것은 나의 일. 어머니는 준비해 놓은 콩을 씻고
밤새 담가둔다. 이른 새벽부터 메주콩 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면,
눈 비비며 일어난 동생이랑 익은 콩을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누렇게 익은 콩은 자루에 담아 발로 밟기도 하고, 치대면서 으깨었다.
아버지는 커다란 상판을 펼쳐놓고 메치기를 하면서 고운 메주를 만들었
다. 새끼줄로 엮은 메주는 마루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말린다. 눅눅한
냄새가 나면, 추운 날씨에도 대문을 활짝 열어 환기시켰다. 어쩌다 검은
곰팡이가 생기면 호호 불어대는 어머니의 정성이 대단했다. 어른들은
된장 맛이 좋으면,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긴다며 그해 운수를 점치기도
한다.
장 담그는 날이 다가오면 커다란 그릇에 물과 소금을 풀어 저어준다.
솔을 이용해 틈새에 피어있는 곰팡이를 씻어내고 양지바른 곳에서 말린
다. 메주를 커다란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은 뒤 계란을 띄워본다.
붉은 고추 몇 개 둥둥 띄우고, 숯을 불에 빨갛게 달궈 넣으면 부지직
소리가 난다. 시간이 흐르고 밤낮이 바뀌면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기
시작하면 안심한다.
익어가는 된장 속에서 시골밥상 냄새가 올라온다. 아! 바로 그 냄새.
한겨울 추워서 어머니 가슴팍 속으로 얼굴 묻으면, 광목누비적삼 속에
서 났던 그 냄새. 아, 마음이 열리며 눈물이 쏟아진다. 풍기는 냄새 속에
자식 사랑의 밀어密語도 숨겨 있는 것일까. 콩, 항아리, 햇빛, 훈풍, 그리
고 짜디짠 소금. 그게 다 어머니 마음이었던 걸 이제야 알겠다.
올해도, 담가놓은 된장항아리 속에는 메주들이 노르스름하게 익어간
다. 바람이 불어주는 훈풍 속에 간장은 발갛게 우러나겠지. 잘 익은 된장
을 으깨고 항아리 가득 담아놓으면 황금이 부럽지 않다. 잘 숙성된 된장
으로 음식을 만들면 맛있는 건강밥상이 차려진다. 숙성된 된장항아리
속에는 소박하고 정겨운 고향의 풍경과 어머니 냄새가 퍼져서 마음은
넉넉함으로 행복해진다.
햇볕 좋은날 된장항아리 뚜껑을 열어놓으며,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항아리 속 공기가 구수한 냄새로 화답한다.
이정자 -----------------------------------------------------------------------
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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