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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사색의 창] 길을 잃다 - 문기욱

신아미디어 2012. 6. 4. 20:31

길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데,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할 길은 어느 길일까요? 살아가면서 중요한 길의 의미가 달라지는가 봅니다.

 

 

 

길을 잃다


   겨울산행은 설레는 여행이다.
   충북 금수산 자락 해발 986미터의 남산. 올해 들어 눈다운 눈이 내리
지 않았지만 며칠 전 지방의 폭설로 정상에는 눈이 많이 쌓였다는 정보
에 기대를 걸었다.
   등산로는 초입부터 경사가 심하여 오르기에 숨이 찼다. 경험 많은 회
원들은 선두그룹을 이루며 일찌감치 꼬리를 감추고, 여자들과 고령의
회원들은 뒤처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나는 답답한 나머지
그들을 앞질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두그룹을 따라잡을 수
가 없다. 어쨌거나 점심은 동산에서 함께하기로 했으니 그곳에서 모두
만나게 될 것이다.
   정상에 가까워지는 걸까. 800m고지부터는 바람 끝이 점점 거세어지
고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다. 은백의 준령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세상이
아스라하다. 이 선계에 선 느낌을 어디에 비기랴!
   산길은 종종 인생길과 닮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험
한 오르막길에서는 포기하고 싶다가도, 그 고행을 무릅쓰고 정상에 올
라서면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또한 정상에 오르면 곧 내려와야 하듯,
우리가 추구하며 걸어온 인생의 길도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반. 드디어 점심 약속장소인 동산에 도착했
다. 그런데 웬일일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선두그룹이 보이지 않는
다. 황량한 눈밭에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더 이상 혼자서 산행을 하는 것은 무리다 싶어, 삼거리로 되돌아가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휑한 눈밭에 혼자 앉아 점심을 드는데 사위가 적막강산이다. 미아가
된 것마냥 무서워진다. 삼십여 분이 지나가는데도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다. 혹시 중도에서 하산해버린 것은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살아가는 길목에서도 길을 잃고 허둥댈 때가 가끔 있다. 지금 나는
10년 넘게 근무해오던 직장에서 퇴사 준비를 하고 있다. 세상은 나를
보고 나이가 너무 들어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하산해야 하지?
   어느새 두 시가 넘었다.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조금 있으
면 일몰의 시간이 된다. 겨울 산길에서는 오후 3시가 되면 오르던 길도
멈추고 하산해야 한다. 특히 해가 짧은 동절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철칙이다. 내 배낭 속에는 귤 한 개, 반 통의 물이 남아 있을 뿐, 시간을
오래 지체할 여력도 없다. 어서 하산해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하나는 원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길, 둘째는 지도에 표시된 등산로, 그리
고 셋째는 산사 방향의 지름길이다. 결국 산사 방향의 지름길을 택하기
로 했다. 사람들이 오간 발자국도 선명할 뿐더러 절로 통하는 길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길에서도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20여 년 재직하던 직장을
IMF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선배로부터 함께 일을 해 보
자는 권유를 받았다. 얼마간의 돈을 투자하는 조건이다. 소위 명예퇴직
금을 투자하는 모험을 결정해야 했다. 또 월급생활만 하던 내가 사업이
라는 것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그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른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선택은 고려 후에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산길은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종종걸음을 쳐
보지만 굴러 넘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졸아든다. 넘어져 골절사
고라도 나게 되면? 산짐승이라도 만나게 되면? 장비로는 호루라기 하나
와 보온용 내피 한 벌이 고작인데. 등이 땀에 젖어온다.
   하산까지의 시간 동안, 홀로 걷는 그 길은 외롭고 두렵고 착잡했다.
저절로 나의 인생행로가 되짚어졌다. 마디마디에 쓸쓸하고 힘들고 난감
했던 시간들이 기억났다. 제법 긴 여정이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잃은 슬픔, 외롭게 보낸 청소년기.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해 방황하던 시절, IMF로 당한 명예퇴직. 그리고 지금의
직장에서 퇴직하기까지, 여러 개의 질곡의 늪을 건너온 인생길이었다.
그러나 어찌 시련만 있었으랴! 예쁜 색시 얻어 아들 낳고 딸 낳고, 이제
는 귀여운 손녀까지 얻었으니 이만한 행복을 누리는 인생도 참 괜찮지
않은가. 조심조심 알뜰하게 잘 꾸려온 인생인 셈이다.
   하산로의 판단은 적중했다. 내리막길이 비록 험하고 미끄럽기는 했지
만 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산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고
약속장소까지 가려면 한 시간 남짓 걸릴 것이다. 이젠 서둘러 내려가면
된다.
   내 인생의 하산길도 이랬으면 싶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렇다 할 방향
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늙어가면서 세상을 겸허히 즐기는 게 아니라,
욕심줄을 잡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
는 것을. 내 영혼에 어둠의 장막을 드리운 채 소멸되어 버릴 것을. 그러
나 마지막 그때까지 의연하게 살아 있고자 한다. 내 영혼의 존엄을 지키
면서 말이다.
   ‘인생에 유효기간이란 없고, 꿈이 있는 한 인생에 정년은 없다.’고 했
다. 나는 새 길을 찾아 나아갈 것이다. 여생에서도 또다른 행운의 길을
걸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문기욱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