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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사색의 창] 꽃의 길을 가다 - 김양희

신아미디어 2012. 6. 4. 20:15

꽃이 활짝폈다가 지고, 다시 활짝 피어납니다. 이제는 꽃이라서 모두 예뻐보입니다.

 

 

 

꽃의 길을 가다


   숲길에 들어서자 굵은 빗방울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밤새 내린
비를 머금은 나무들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이마에, 뺨에 톡톡 물방울
노크를 했다. 산천에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약수터에는 작년 그 자리에 황금빛 복수초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겨울에서 봄이 오는 맨 처음 전령사. 아직 잔설이 온전히 녹지도
않았는데 언 땅을 헤치고 나온 새아씨 맑은 표정이 눈길을 잡는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찬바람 헤집어 이 풍진 세상을 다시 찾아온 걸까. 매화
는 우뚝 선 가지에서 자태를 뽐내지만 이 꽃은 원시의 땅에 그냥 엎드려
수줍게 봄을 알린다. 예부터 복수초가 피어나면 화분에 담아 존경하는
이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상서로운 꽃임에는 틀림이 없다.
   산길 후미진 곳에는 원추리꽃 군락이 있다. 두 줄로 겹쳐난 초록 잎
대의 윗부분에 황색 꽃이 달리면 꺾어다 화병에 꽂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
야 하는 꽃이다. 꽃은 매일 새로 피어났다. 피어서는 하루만 지나면 지고
대신 새 꽃이 연달아 피곤 했다. 잉태한 부인이 원추리꽃을 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으니 간절한 그리움은 꽃과 같은 것일까.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 배경 속에서도 하잘 것 없는 풀꽃들은 ‘그날’
을 기다리며 이 땅을 지킨 민초의 상징이기도 했다. 삽주꽃, 비비추꽃,
노랑매발톱, 마타리와 지천에 널린 구절초와 쑥부쟁이…. 사람의 삶 역
시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더 많은 기다림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은 변치
않으니 때 되면 꽃피우는 꽃의 숙명은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하겠다.
   기관지나 목감기에 탁월한 효능을 가진 도라지는 그 청초하고 앳된
모습에 비해 슬픈 전설을 지니고 있다. 옛날 도라지라는 처녀가 식구라
곤 없이 먼 친척 오빠와 둘이 살았다. 어느 날 오빠는 중국에 공부하러
떠나고 처녀는 어느 절의 스님에게 맡겨졌다. 십 년을 기약하고 떠난
오빠는 세월이 지나도 오지 않고 결혼했다느니, 돌아오던 배가 파산했
다느니 흉흉한 소문만 들려왔다.
   도라지는 혼자 살기로 산신령과 약속을 했고, 세월이 흘러 백발 노파
가 된 도라지는 그리움에 사무쳐 문득 옛날 오빠를 기다리던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지금이라도 오빠가 돌아와 준다면’ 하고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뒤에서 누가 ‘도라지야, 이것 봐.’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꽃이 되었다. 혼자 살기로 맹세하고는 또 다시 오빠
를 기다리므로 산신령이 벌을 내린 것일까. 애절한 기다림은 꽃의 이름
으로 다시 살아난다.
   전설은 현실적 근거가 없는 허황된 이야기나 풍설인지도 모른다. 그
러나 꿈이 없는 현실에서 더러는 꿈속으로 젖어들고 싶은 환상에서 사
람들은 더러 전설에 미혹되는 게 아닐까. 그래선지 한철 피었다 거짓말
처럼 사라지고 마는 꽃의 세계에는 유달리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보석을 지나치게 좋아한 페르시아 여왕이 보석에 깔려 죽고 난 뒤 그
보석들이 사방에 흩어져 여러 가지 색깔의 꽃으로 피어났다는 채송화,
순결한 처녀를 찾아 내려온 천사가 늠름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그가
틔운 씨앗에서 자란 나무 꽃이라는 치자꽃이 있는가 하면, 홀로 살던
종지기가 간 쓸쓸한 죽음의 자리에 종처럼 생긴 꽃이 피어났다는 초롱
꽃의 전설 등은 한결같이 슬프지만 그럴싸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오색 명주실로 풀려 들어온 햇살이 아스름한 졸음을 불러올 때면 양
지바른 산허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귀나무꽃은 그 고운 모습대로 마
음을 녹여주는 꽃이다. 훈풍에 흔들릴 때마다 분홍 비단실을 가지런히
잘라놓은 듯, 모양은 매혹적이지만 나무는 도끼나 낫의 자루 등 농기구
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외유내강한 이 꽃의 전설 또한 갈라진 부부의
연을 회복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아무래도 꽃의 이야기 중 백미는 자목련의 전설이 아닐까. 하늘의 옥
황상제가 아끼던 공주가 아비의 뜻을 저버리고는 무서운 북쪽 바다의
신神을 사랑하게 됐다. 그러나 바다 신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이루지 못
할 사랑,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바다
신은 공주의 시체를 건져 땅에 묻고는 외로움을 덜어주려 부인에게도
잠자는 약을 먹여 나란히 묻어주었다.
   후일 공주 무덤에선 흰 꽃(백목련)이, 부인의 무덤에선 자주색 꽃(자
목련)이 피어났다. 그런데 그리움이 많은 공주의 무덤에서 핀 흰 꽃은
봉오리가 모두 북쪽으로 향해 피어올랐다. 목련을 북향화라고도 부르는
이유라 하겠다.
   실오리 같은 이내가 나른하게 피어나는 봄철이 오면 겨우내 움츠렸던
기운이 꽃의 환상으로 살아난다. 꽃의 전설을 따라가 본 봄날, 꽃에게도
길이 있다.

 

 

김양희 -----------------------------------------------------------------------
199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