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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작품론] 여성 욕망과 현실, 그 담론의 유형 - 박양근

신아미디어 2012. 6. 1. 18:47

수필과 비평 4월호에 수록된 최민지님의<입술에 대해 말해도 될까>, 권신자님의 <깐깐이를 갈아엎은 무덤덤이>, 정선모님의 <두개의 선> 등 3편의 수필에 대한 작품론을 소개합니다. 수필에 평이 더해지니 수필이 더 감칠맛이 납니다.

 

 

 

여성 욕망과 현실, 그 담론의 유형


들어가며
   문학은 시대사조를 반영한다. 사회가 급변하는 오늘날의 가장 두드러
진 현상은 여성 지위에 관한 변화로서 대표적인 현상은 페미니즘의 확
대라고 하겠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의 체제하에서 여성의 신분, 연애,
욕망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다는 반성에 토대를 둔 여성주의 비평이
다. 그 논리는 여성의 권리와 해방과 자유에 근거를 둔다.
   사회현상은 무엇이든 문학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여성수필도 마찬가
지다. 그런데 오늘의 여성수필에 등장하는 여인은 정한과 전통적 미덕
에 순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은 모두 그런가.
절대 아니다. 전통적 여성상은 오늘날 살고 있는 여성을 제대로 대변한
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학으로서 수필은 여성이 지녀야 할 미덕을 옹호
할 필요가 없지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 그대로의 여성문제를 인
식하고 그들의 욕망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수필은
현 한국수필계의 보수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진실한 현대여성 서사를 발
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수필의 기본구조는 너무나 단순하다. 특히 어머니-여성-딸로
이어지는 3대 가문사는 희생과 인내에 순종하는-굴종하는-행적을 미
화하고 있다. 여성수필이 여성의 몸과 말로 표현하여야 함에도 비판적
시선이 두려워 여성작가는 여성 화자를 분식扮飾함으로써 젊은 여성들
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오래전에 박제된 여성상을 별
탈 없이(?) 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여성주인공을 페
미니즘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보다 솔직하게 짚어보
려 한다. 이를 위해 3편의 문제작을 선정하여 1) 여성성의 자유를 추구하
는 여성, 2) 남녀성의 타협을 이루려는 여성, 3) 남성 중심주의에 순응하
는 여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현실과 삶을 여성담론으로 분석하려 한다.


1. 최민자의 몸과 담론의 여성주의 해석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의 몸을 ‘바라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선과
색깔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몸의 소유자(owner)는 여성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칭송하는 주체는 남성이다. 문학의 펜과 디카를 들고
있는 것도 남성의 손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은 하루도 빠짐없이
말하고 있지만 자신을 위한 진정한 발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여성은 말한다. 아침에는 “화장이 잘 안 먹네.” “머리를 어떻게 하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하지.”라고 말한다. 낮에는 “다리 살을 어떻게 빼지,
다이어트 중이야.”라고 걱정하고 저녁에는 “나이는 못 속여, 아이고 다리
야.” 하고 호소한다. 여성수필가는 이런 본능적인 말을 외면하고 사회가
허용하는 모범 담론만 고르면서도 자의적으로 택하였다고 말한다. 무어
라고 변호하든 한국의 여성수필가들은 부지런히 쓰지만 진정 말하지 않
고 있다.
   최민자는 그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 여성의 언어로 여성을 말하는 통
렬한 수필을 발표한다. 그것이 <입술에 대해 말해도 될까>라는 수필이
다. 담대한 문체로, 느끼하면서도 허무한 어조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철학적 위트로 찌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언변은 늘어진 수다인
듯하면서도 버릴 낱말이 하나도 없는 연극 대사를 듣는 기분에 빠지도
록 한다.
   최민자는 지금 무대 위에 있다. 무대인 지하철 좌석에 립스틱 하나만
을 달랑 들고 있는 일인 단막극 배우가 그녀다. 익명의 여성들에게, 무엇
보다 사방에 널린 남성들에게 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여자를 보라고
어르고 타이른다. 틈틈이 그녀의 립스틱은 탄환처럼 관객의 심장을 향
하여 날아온다.


   여자들은 왜 그리 립스틱에 집착할까. 선정적인 색조, 불온한 모양새
로 손가락만 한 캡슐 안을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탄환 같은 그것에 말이
야.……램프처럼 어두워 보이는 민낯도 립스틱만 발라주면 생기가 확,
살아 보이거든. 치마가 계집아이의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패션이라면
립스틱은 성인여자의 인증샷 같다 할까.……‘여기는 그대가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걸신께서 은밀히 거처하는 동굴 입구니라. 삼시 세 때 받들어
모시며 문안을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하는, 준엄한 신탁의 표지였을까.


   최민자는 여성 몸의 일부이자 전부인 입을 “걸신께서 은밀히 거처하
는 동굴”이라고 부른다. 동굴은 여성을 지키는 참호이므로 “붉은 물감”
으로 테두리를 치는 립스틱은 “전투에 임하는 탄환”과 같다. “성인여자
의 인증샷”이기도 하다. 이 담론은 입술을 소유하고 그것을 활용하려는
여성의 언술에 해당한다. “소녀, 새댁, 엄마, 아줌마, 할머니”라는 세월
의 변신을 거칠지라도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순간은 “물자와 정보
의 출입으로 칠이 벗겨진 나들목에 도색작업”을 하는 때이다. 그 작업
은 여성 사이에서 강한 전염성을 갖는다. 여자로 사는 순간은 립스틱이
입에 발린 기간이라는 구절조차 여성 욕망에 충실한 여성성을 보여준
다. 이렇게 전달되는 대사는 어느 부분에서도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립스틱이 겨냥하는 남성은 여성을 위해 “산 채로 포획해야 하는” 재물
이다. 잡힌 그놈은 집을 짓고 먹이를 나르고 약탈자를 막아준다. 종족보
존을 위한 짝짓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과정을 “심리적 접합기
제가 작동하면 양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고 절차 없는 문물교
역이 이루어지고 역사적 현실적 책임”을 진다는 은유로 설명한다. 그래
서 “중차대한 전략적 관문에 빨간 똥그라미 두 개”를 둘러치는 화장은
성스러운 의식으로 발전한다. 나아가 “입술” 화장은 남성을 세뇌하는 공
작工作이라는 합법성을 부여받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수필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이 착함, 순
결함이라는 추상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최민자의 여성은 여성
몸이 지닌 효용과 욕망에 자부심을 갖고 남성 지배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빨간 포위망”이라는 자위수단을 항상 지니려 한다. 여성 몸을
주체로 삼는 여자들은 립스틱으로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남성 관객에게 향하는 립스틱 공격은 간교하지 않다. 밖으로 드러남으
로 더욱 아름다울 뿐이다.
   나아가 최민자는 립스틱을 칠하는 것은 여성 고유의 놀이라고 말한
다. 유년기의 딸은 어머니의 화장법을 모방한다. 그것은 남성을 사냥하
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여성 본래의 본성에서 비롯한다. 여성의 콤플렉
스를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개념으로 설명하거나 여성을 구멍으로 묘사
한 라캉의 정신분석을 빌릴 필요가 없다. 여성은 약하다는 선입관에 빠
지기를 거부하는 작가는 “꽃은 스스로 꽃을 위해 필 뿐”인 것처럼 “화장
은 일단 나를 보려는” 자위自爲의 행동으로 정의한다.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몸 말하기를 하므로 립스틱은 여성 언어의 일부라
는 것이다.
   지금까지 다수의 여성수필은 여성 몸의 일부만 강조해왔다. 진통, 출
산, 노동, 치매 외에는 여성 생식기, 처녀성, 화장, 그리고 욕망을 고의적
으로 외면하거나 불순하게 여겨 왔다. 이런 식의 담론은 여성들의 자기
혐오를 조장하기 쉽다. 진정한 정체성을 여성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것이 오늘날의 여성수필이 안고 있는 문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민
자는 그 문제를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빌어 풀고 있다.


   여자가 웃을 때 세상은 평화로운 천국이 되지만 양 입술을 앙다물고
봉인하거나 폭포수처럼 독설을 쏟아낼 때, 사랑도 평화도 물 건너가고
말지. 셈 밝은 남자들은 알고 있을 거야.……소낙비와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리고 떫은맛을 무르익은 단맛으로 숙성시켜온 늦가을 홍시
같은 여자들의 입술이 무얼 말하는지, 언제 어디서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이야.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단 한 줄도 느슨하게 읽을 수 없는 최민자의 문장을 종결하는 여성담론
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성욕망의 레토릭은 어디까지나 여성 글쓰기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함을 재강조한다. 여성의 몸을 그려내는 것은 유혹
당하는 남성의 시선에 불과하다. 화자는 여성의 몸은 이제 남성의 시선
에서 벗어나 여성 주체의 글쓰기를 위한 제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점에서 <입술에 대해 말해도 될까>는 자기애를 위한 글쓰기로
서 디지털시대의 여성상을 정립시킨 여성 말하기에 해당한다.

 

2. 권신자의 남녀성의 타협과 신앙
   권신자의 <깐깐이를 갈아엎은 무덤덤이>는 요즈음의 유행어인 “변했
어요.”의 일부이다. “교실이, 고부가, 사회가 변했어요.”를 변형한 “부부
가 변했어요.”를 모티프로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 여류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우리가 변했어
요.’라는 주인공의 성격 발전을 다룬 소설이다. 남성주인공은 남성 우월
감을 갖고 여성주인공은 “부자 남자는 여성을 비하한다.”라는 편견에 사
로잡혀 있지만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각자의 편견을 극복하고 결혼에
다다른다. 일종의 ‘연애결혼노트’이다.
   권신자의 수필에 등장하는 여성화자도 초면의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남편과 아내라는 부부로 합일하는가의 과정을 여성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수필은 ‘결혼노트’다. 대부분의 여성수필은 그들의 인생을 고
백하는 구조로 엮어진다. 이렇게 살펴보면 여성수필은 여성의 인생을
적은 학창노트, 연애노트, 결혼노트, 육아노트, 노후노트….의 양식을 통
해 가문사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노트북에서는 순응과 반항,
혼미와 탈출, 허구와 현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계속 이어진다. 그중에서
결혼노트는 일기, 수기, 논픽션의 다양한 양식을 취하면서 여성의 관점
에서 말하는 부부의 문제를 담는다. 권신자의 결혼노트에도 몸과 말로
이루어지는 여성언어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노트를
엮고 있는 이념적 배경은 여성 중심적 논리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남성
중심 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위한 방책으로 기독 교리를 도입한 곳이
남다른 차이라고 하겠다.
   두 명의 등장인물은 “꼬장꼬장 따지는 아내”와 “무덤덤한 남편”이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인생천칭”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애를 쓴다. 당연
히 사건은 만남, 충돌, 투쟁, 자아각성, 화해의 흐름을 거치면서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변화한다. 그것을 작가는 전쟁과 종전終戰의 담론
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혼 전, 연애시절에는 사소한 일에 티격댄다. 여자는 따지고 남자가
삐치는 싸움은 누가 먼저 주도권을 먼저 쥐려는 탐색전에 가깝다. 여성
담론으로 해석하는 화자는 그 사건을 “사랑하는 남녀에겐 문제가 별 문
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데 처녀시절의 권신자는 “못돼 먹
은 여자”가 아니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있고 상대남자는 여성
의 불만에 꿈쩍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을 지켜온다.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가부장 제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결혼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중년이 된 권신자의 입으로 설명된다.
그녀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통해 남녀는
“생판 다른 별”에서 왔음을 자각한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이 된다. 여성
이 집안일에서 벗어나 독서를 하는 활동은 주부와 어머니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여성주의적 각성의 출발이라고 간주
할 수 있다. 이 무렵 남편도 변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속이 상하여 심장
병이 생기자 남편인 남자는 “성경책”을 읽으면서 “자연만물에서 창조주
의 신비”를 인정해나간다. 사회가 만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
나 인간의 존재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신앙을 통하여 학습한다는 뜻이
다. 그는 이런 종교적 가르침을 통하여 지금까지 지켜온 남성 이데올로
기를 수정하고 “아내가 자기 몸의 일부”라는 새로운 원리를 받아들인다.
“아내(여자)는 자기 몸(남자)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은 신체적 종속 이론
이 아니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평등과 합일의 종교적 민주
주의에 해당한다. 이로써 페미니즘의 편견과 가부장제도의 오만이 함께
사라지면서 평등주의라는 새 이념인 배필의식이 대두한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무시당한다는 선입견이 사라지고 새로이 눈을 떴
지요. 남편의 듬직한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시대적으로
상처 입은 상흔을 지녔을 수 있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
이 미친 아내는 “역시 악(자기중심,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내가 누구를
비난한다 말인가.” 하고 깊이 자각했지요.


   “부부가 변한다”라는 담론의 저변에는 모든 인간은 나약하고 원죄를
나누어 가진다는 기독교 사상이 깔려진다. 권신자는 이때가 되면 남녀
는 서로의 평등을 인정하고 새 가정을 이루는 분위기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부부는 평등하다는 권신자의 배필론은 최민자의 립스틱론과 달리 지
배․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그 관계는 나약한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휴머니즘의 논리를 갖는다. 그 “사람 사랑하는 법”은
종교의 교리와 가깝다. ≪오만과 편견≫의 해피엔딩처럼 그들도 오랜
갈등을 거쳐 진정한 부부관계를 달성한다. 그 정신적 진화와 변신을 권
신자는 “47년 인생살이 결혼노트”에 적고 있다.
   그렇더라도 권신자의 수필은 페미니즘에 부분적으로 접근한다. 남성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양성평등의 일부일처제로 간주하지 않을뿐더러,
이상적 결혼생활을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남성권력을 탈취하거나 여성
의 일방적 승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노트 속의 남녀는 타자의 성 차이를
인정하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에 수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유리하게 반전시킨다. 그래서 중년의 연륜이 택한 현실적
인 전략과 그것을 기록하는 결혼노트의 언어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페미
니즘을 따른다. 그 중심 전략은 타협과 대화와 기다림이다. 그녀는 자유
와 욕망을 추구하기 위하여 여성 몸과 여성 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를 빌린 페미니즘으로 창조질서를 재정립하고 있
다. 그 점에서 <깐깐이를 갈아엎은 무덤덤이>는 남성 원리를 비판하는
여성담론과 기독교신앙으로 재해석한 결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여
성주의수필에 속한다고 하겠다.


3. 정선모의 남성주의로의 회귀
  
정선모의 <두 개의 선>은 여성의 관점에서 사회미덕을 바라보는 이야
기다.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때 한 운동회 달리기를 소재로 “가야 할 선과
가지 말아야 할 선” 을 무엇으로 결정하는가를 말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선모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해 버렸고 그것을 “몹시도 나를
부끄럽게 만든 기억”으로 간주한다. 어쨌든 그녀는 여성 학부형으로서
그때의 행동을 참회하고 있다.
   여성의 죄의식은 잘못의 근본원인을 떠나 남성 중심적 봉건제도로 생
겨나기도 한다. 칠거지악이 그 실상을 요약한 대표적인 족쇄이다. 그것
을 확장하면 군사부君師父일체라는 봉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면서 오
늘날의 여성주의와 대립을 이룬다. <두 개의 선>에 등장하는 담임선생
님이 남성이라는 뚜렷한 근거가 없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담임선생님이
남성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것이 아니라도 군사부 일체의 대표자임
에는 틀림이 없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교직이 성직”임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그는
“아이들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자책”하고 “박봉의 월급을 자기 반의
보육원 아이의 우유 값”으로 사용하고 “그의 도시락을 몰래 나누어 주
고”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쓰는” 헌신을 실천한다. 군사부의
도리를 보여주므로 그들의 인격은 존중하여야 한다. 정선모가 선생님
의 장점을 열거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타당성을 부
여하는 역할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상대적 계급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그의 트랙을 앞지르거나 침범할 수
없다. 법적으로 말하면 여성, 학부형, 혹은 학생은 넘어갈 수 없는 폴리
스 라인이기도 하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운동회이다. 행사의 취지
는 “선생님과 엄마들은 제자와 자식 앞에서 기량을 펼치며 유쾌한 시간
을 갖는” 것에 있다. 어떻게 하면 마음껏 기량을 펼치면서 즐거운 시간
을 함께 가질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달리기 경주의 경쟁이 벌어지는 현장에는 엄연히 선생님
과 학부형이라는 계층과 엄마라는 여성과 남자 선생이라는 성의 차이
가 존재한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는 경쟁에서 이겨야 할
선수이므로 계급적 대립은 극복의 대상이 된다. 더구나 “총소리”로 시
작하는 달리기는 성공과 실패, 승자와 패자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 불쾌
한 현실이다.


   시합 직전까지 부리던 여유는 간곳없이 나도 모르게 튕기듯 뛰어나가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승부욕이 내 안 어딘가에
숨어있다 폭발하듯 뛰쳐나온 것일까. 이미 선생님은 안중에 없었다. 무
조건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전력 질주
를 한 것이다.


   여성 학부모인 정선모는 최선을 다하여 달렸다. 남녀 차와 사회적 신
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하였다. 승리의 박수와 환
희는 그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환희는 이내 수치심으로 바뀐다. 응원
꾼들은 외면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순식간에 추방당
한 자가 되어버렸다. 여성 화자는 경주의 규칙에서 보아도 당당하게 우
승하였다. 바깥쪽 라인이 아니라 안쪽 희미한 라인을 달렸지만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 아니다. 사전에 충분하게 안내받지 못하였고 고의적으로
안쪽 라인으로 달리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 달린 학부모가 선생님과 정
답게 손을 잡고 달림으로써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칭송받고
당사자는 조롱감이 되었다. 뒤의 경우는 담임선생이라는 권력자의 체면
을 세워주려는 도리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구경꾼들
도 무한경쟁보다는 “알아서 비긴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연배
가 높은 선생님을 이긴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에 불과하
며 그 행위는 군사부의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개의 선”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선 스승의 날에는 선생
의 권위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윤리이다. 페미
니스트의 관점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고 논리이다. 하지
만 정선모는 “인격적 신분이 높은 자에게는 겸손하여야 한다.”라는 타자
의 논리에 굴복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것은 아직도 여성이 반
자유주의이고 반페미니즘적인 가치에 익숙해져 있음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는 항상 위험한 자를 추방하였다. 사회적 희생자인
대부분의 여성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남성의 공격에 앞서 스
스로 자아비판함으로써 잠재된 욕망과 능력을 제한한다. 그것을 따르는
정선모는 사회와 화해하는 방법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가기 전에
잠시 멈춰 가는 길을 살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남아 있는 여성의
자아모순이 도덕성이라는 가치로 채색된다. 하지만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물론 완전한 방식은 아닐지라도-부계와 남성 중심 권력을 묵인
하여 여성주의 가치를 배신하는 일일드라마가 된다. 앞서 권신자가 “부
부가 변했어요.”라고 결혼노트에서 말하였다면 정선모의 <두 개의 선>
은 “나는 변한 시늉을 하였어요.”라는 숨겨진 상처를 적은 여성노트라고
말할 수 있다.


닫으며
   세 편의 문제작은 여성이 자신의 몸과 말로 남성, 남편, 교사라는 타자
에 대적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은 여성성을 정립하면서 사
회적 공간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가능하면 기존의 여성적 가치
인 “타자와의 관계 지향성”에 문제를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최민자
가 <입술에 대해 말해도 될까>의 결미에서 남성에게 “언제 어디서고 귀
기울여 들여야 한다 이 말씀이야.”라고 말하고, 권신자가 “사람은 일어서
면서 남도 일으켜 준다.”라고 말하고 정선모가 “가는 길을 멈추어 살펴
라.”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음은 여성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근
본도리를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문학 속의 여성 이미지는
삶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갈수록 많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발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보다는
여성처럼 연약한 남성에게 먼저 다가서는 여성의 성역할도 잊지 말아야
것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여성 주인공을 다루는 여성수필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
보면 달리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글 읽기는
젊은 독자들의 공감과 호기심을 얻는 주제와 소재의 발굴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 엄폐된 여성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수필의 지평을
넓혀 궁극적으로 현실 속의 여성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수필의
진실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박양근 ----------------------------------------------------------------------
부경대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영남수필학회장.
수필집: ≪길을 줍다≫, ≪서 있는 자≫, ≪문자도≫ 등.
저서: ≪사이버리즘과 수필미학≫, ≪좋은 수필 창작론≫, ≪미국수필 200년≫ 등.
수상: 신곡문학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