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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두 개의 선 - 정선모

신아미디어 2012. 6. 1. 18:35

두개의 선을 상상하면 여러분은 평행선을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십자선을 생각하시나요.

 

 

 

두 개의 선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가끔 운동하러 나간다. 다섯 살짜리
손자랑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넓은 운동장을 신나게 뛰어다니다
보면 제법 땀이 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면 불암산 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이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까르륵대며
웃는 아이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살
짝 흔들고, 굴참나무의 무성한 잎을 일렁이게 하며 지나가는 바람, 방금
운동장에 미소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갔나 보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운동장에 흰색의 둥근 선이 그려져 있는 게
눈에 띈다. 달리기 시합을 했던 흔적이다. 흐릿하게 그려진 선도 있고,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진 것도 있다. 달리기를 하다 지워져 다시 그렸을
것이다. 그 선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 일이 떠오른다. 나를 몹시도
부끄럽게 만들었던 기억이다.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
은 아이들을 어찌나 사랑하셨는지 교직이 성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
끼게 해준 훌륭한 분이셨다.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진실로 마음 아파하
며 아이들을 나무라기 전에 스승이 부족한 탓이라며 자책을 하던 분이
셨다. 철없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정성 어린 훈육에 감화되어 제법 고분
고분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반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다. 박봉의 월급을 쪼개어 담임하고 있던 보육원 아이의 우유를 대
어주시는가 하면 당신의 도시락을 다른 아이들 몰래 책상 속에 넣어두
기도 하셨다.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서 주기도 하여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제일 사랑받고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학년이 올라가
도 틈만 나면 그 선생님의 반에 우르르 몰려가 한참을 선생님 곁에서
놀다 오곤 할 만큼 따랐다.
   그해 스승의 날이었다. 전에 없던 행사가 학교에서 열렸다. 선생님과
학부형의 운동회가 열린 것이다. 줄다리기와 피구, 달리기 등 몇 개의
종목으로 두 시간 남짓 경기를 펼쳤다. 학교에서 늘 주인공이었던 학생
들은 운동장 가에 둘러서서 각자 자신의 담임선생님과 엄마를 응원하느
라 함성을 질러대고, 그들을 가르치고 뒷바라지하던 선생님과 엄마들은
제자와 자식들 앞에서 있는 힘껏 기량을 펼치며 모처럼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각 반 대표의 달리기 순서가 되었다.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달리기
시합에서 내가 우리 반 선수로 뽑혔다. 담임선생님과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여유 있게 서로 승리를 기원해주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
다. 시합 직전까지 부리던 여유는 간곳없이 나도 모르게 튕기듯 뛰어나
가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승부욕이 내 안 어딘가
에 숨어 있다 폭발하듯 뛰쳐나온 것일까? 이미 선생님은 안중에 없었다.
무조건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전력질주
를 한 것이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허리에 감겨드는 줄의 쾌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하랴. 헉헉거리며 허리 굽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즉시 터져 나와야 할 응원꾼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
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뒤늦게 도착한 선생님이 그 까닭을 말해주었다. 선명하
게 그려진 선을 따라 달려야 하는데 내가 달린 길은 안쪽으로 희미하게
그려진 선이었다고. 선생님은 처음엔 제대로 달렸는데, 내가 안쪽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미안해 할까봐 당신도 같이 안쪽 선으로 달렸다고.
그 선은 저학년 아이들이 달리는 선이기에 오늘 좀 더 크게 새로 줄을
그었다고 했다. 모르고 그런 것이니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데, 활
활 타는 숯을 뒤집어 쓴 듯 얼굴이 화끈거려 어떻게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내 뒤에 달린 선생님과 학부형은 정답게 손을 꼭 잡고 처음부터 끝까
지 함께 달렸다. 그 두 분은 학교 담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우레와 같은
함성과 큰 박수를 받았다. 그날의 운동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연
출한 두 분은 최우수선수상을 공동 수상했다.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날의 운동회에서는
무조건 이긴 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짧은 선을 택하
여 달린 나는 졸지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만 집착하는 인
간으로 추락한 날이었다.
   하필 스승의 날에 열린 친선경기에서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선생
님을 이겨 무슨 큰 영화를 보겠다고 그토록 악착스레 달렸을까. 순위가
매겨지는 일이라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서 달리는 것이 최
고인 양 여기며 살아온 내 삶에 확실히 브레이크를 걸어준 사건이었다.
가장 못난 경기와 가장 멋진 경기가 연이어 벌어졌던 그때의 기억은 세
월이 아무리 흘러도 생생하게 떠올라 시도 때도 없이 가시처럼 나를 찔
러댄다. 내 의견이 옳다며 바득바득 우길 때라든가 남의 생각은 물어보
지도 않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때, 문득 나는 새로 그려진 바른 길을
외면하고, 가서는 안 될 흐릿한 선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왈칵
겁이 나는 것이다. 그때의 선생님처럼 나의 실수를 덮어주려고 함께 잘
못된 길로 달려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가는 길을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수필과비평≫, 4월 126호

 

 

정 선 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