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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사색의 창] 모녀 축가 - 고해자

신아미디어 2012. 5. 31. 19:01

결혼과 축하를 위한 축가. 행복한 미소가 입가를 타고 마음으로 흐르네요. 

 

 

 

  모녀 축가


   축가를 듣다 발칙한 눈물이 번질까요.
   양가의 어머니 두 분께서 화촉을 밝힙니다. 창가로 보이는 한라산의
잔설도 반짝거리며 남동생의 결혼식을 축하하지요.
   고씨 성을 가진 올케를 맞아들이기까지 순조로운 길만은 아니었습니
다. 알지 못할 완고함이 낳은 아버지의 역량이셨지요. 결혼을 허락한
양가는 소박한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식장 입구에서의 남동생은 광택이 나는 회색빛 예복을 입고, 애교살
의 눈매로 맞아주었지만 가슴만은 줄곧 비장해 보입니다.
   남동생의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지도해주신 교수님께서 주례를 맡아
주셨네요. 같은 과의 선후배 사이인 신랑과 신부여서 전모를 꿰뚫고 계
신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신해주시는 아쉬움도 정겹고, 다소 긴 주례사 내내 많이 웃도록 배
려해주셨습니다. 조금 늦은 출발인 만큼 끝 모를 시련의 고비를 맞닥뜨
리더라도, 둘은 잡은 손 더 꼭 잡으려 힘을 쓰겠지요. 상사화의 꽃과
잎 사이처럼 맴돌기만 하던 긴 시간들이 둘 사이를 다져놓았을 테니까
요.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몸소 터득한 이들이 피워낼 꽃은 어떤 모습일
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신랑 측의 좌석 첫줄에 앉았습니다. 제 곁엔
축가를 부를 막내 여동생이 조카와 나란히 레드카펫의 가에 앉아있지
요. 제부는 딸의 뒷줄에 앉아서 딸에게
   “실수 안 하고 잘 할 수 있어.”
   소곤소곤 자주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축가의 순서에 막내 여동생은 딸과 손을 잡고 나가, 또랑또랑한 목소
리로 인사말도 잊지 않습니다.
   “……. 이 곡을 제 딸과 함께 부르겠습니다.”
   신부 측의 부모님 앞쪽으로 딸의 설 자리를 정해주고, 동생은 단상
위의 피아노 앞에 자리합니다. 키 낮은 보면대를 마주한 조카의 모습엔
진지함이 가득합니다. 눈빛 사인이 오고갑니다. 피아노의 음에 맞춰 차
분하게 조카가 축가를 시작하지요. 그 위로 동생의 마음이 덧입혀지자
조카의 알토도 옥구슬로 빛납니다. 진심을 담은 조카의 낭송 부분 또한
숨죽여 귀 기울이게 하지요. 한 살 위의 오빠와 총각 졸업을 하는 외삼촌
을 위한 공연이랍니다. 모녀의 축가는 초반부부터 식장을 압도하며 오
색풍선으로 두둥실 둥실거리다, 신랑신부의 꿈에게 막강한 날개를 달아
주고 있습니다.
   양가 부모의 좌석과 하객 쪽의 좌석도 빈틈이 없건만, 축가에 홀리듯
파르르, 어떤 압축파일 하나가 풀리며 두 눈으로 번집니다. 막내 여동생
의 결혼식 때, 부모님의 빈자리를 대신하려 애쓰던 남편의 얼굴이 어룽
거렸던 게지요.
   ‘당신이 먼 길 떠나던 날, 막내의 뱃속에서 만삭에 다다르던 조카가
열 살이나 됐네요, 보고 계신가요.’
   무심이 무심을 부른 건지 앞뒤 없는 장면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
다. 한때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인 양 척박한 배경으로 한 시절을 보내야
했지요. 부모님은 하시던 일의 실패로 ‘늦어도 10년’이란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떠난 시기였으니까요. 가족이 모여 낯선 이별여행을 다짐하
던, 그 공간의 눈빛들 또한 흐릿한 풍경으로 가로질렀습니다. 내 마음
모서리의 실핏줄 한 올, 대체 누가 건드려 놓은 것일까요.
   모녀의 하모니는 압권이었습니다. 주례사의 박수 소리보다 훨씬 우렁
찼기에 내게도 환기할 기회를 내어줍니다. 왠지 최후의 일인이 될 때까
지 박수라도 쳐야만 했고, 축가는 어느 마디부터인지 귀로만 보아야 했
습니다. 그 시간이 꽤나 길어보였습니다.
   두 동생은 홀로서기들을 해야 했지요. 맏이의 형편을 아는지라 손 벌
리는 일 없었고, 아마도 방치된 상처들이 저들을 키워낸 것 같습니다.
아픔 없이 피어나는 꽃들이 있을까요.
   저와 띠동갑인 막내 여동생은 부산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육지의
대학을 다니며 운동권 학생으로만 겉돈다고 멀리서 늘 걱정하시던 부모
님이셨지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까지 멀어진다 했던가요. 허둥거리던 나의 삶
보다 통로가 없던 동생들의 고단함은 무수한 기호들로 서걱거렸을 터
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던 누나이자 언니였지요. 이 둘
의 지친 발걸음마다에 드리웠을, 손바닥만 한 그늘조차 거두어주지 못
했으니까요.
   막 끝낸 축가의 원곡은, 본디 부른 장본인이 여동생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시절 속으로 젖어든 끝 모를, 뚜벅거림에 일던 바람결이 동
생을 키워낸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전처럼 막내의 특권쯤으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며 생떼라도 부렸다면,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발길을 돌려 세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고사리 장마에 훌쩍 자라난 고사리마냥 조숙한, 조카까지 동원
한 준비된 축가임을 조금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답니다. 조카는 축혼의
노래 <먼 길 가는 두 사람을 위하여>를 이해하며 자기 엄마와 호흡을
맞췄을까요.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예식, 빼놓을 수 없는 기념사진 찍기가 한창입
니다. 사진을 잘 찍어보려는 기사님과 한 인물 나게 찍히려는 사람과의
소통은 말로 몸짓으로 분주하기만 하답니다. 짧지 않은 여정이 서서히
마무리되어가는 온도가 느껴집니다.
   아침을 거른 하객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문득 시장기가 동하자 비빔
밥 한 그릇이 짠 하며 나타나 줄 것만 같습니다. 넉넉한 그릇 안에서
가지런히 놓인 갖가지의 재료들이 선명한 색감으로, 갓 피운 한 송이
꽃처럼 정갈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우리네 삶을 빼닮은 비빔밥 한 그릇
처럼 어우러져 맛깔스러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가족이기를, 새 올
케에게도 바라보지요.
   모녀의 듀엣은 응원가로, 향기 배인 울림으로 맴돌 긴 여운입니다.

 


고해자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