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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사색의 창] 소나무 단상 - 서정길

신아미디어 2012. 6. 5. 18:55

서정길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튼튼하고 멋지게 자랄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자 합니다.

 

 

 

  소나무 단상


   석양을 배경으로 한 그루 굽은 소나무가 뭇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금호강이 굽이 흐르는 들녘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세천마을이 있
다. 이 마을 허리쯤에 노부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홀로 선 노송이다.
버려진 듯 관심 밖이던 소나무는 어느 날 스타로 변신했다. 사진작가들
이 몰려와 황혼을 배경으로 나신을 촬영하더니 잡지 표지의 모델이 되
고 신문지면까지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어떤 나무보다 대접을 받아왔다. 선비들은 자신의
기개와 변함없는 충절의 표시로 가까이했다. 서민들은 기근으로 허덕일
때 송기로 허기를 채웠다. 연탄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난방과 취사에 최
상의 연료였다. 초등학교 시절 떨어진 솔잎인 ‘깔비’ 채취를 위해 방과
후면 으레 갈퀴와 포대를 둘러메고 산에 올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정부
가 산림녹화사업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부엌을 지킨 어머니들과 애환
을 고스란히 나누었다.
   오십 년 전만 해도 마을 뒷산(金溪山)은 산정 부근 두 곳을 제외하곤 민둥
산이었다. 두 곳은 달성서씨와 김해김씨 선산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노루
들이 무리지어 뛰놀았던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키는 노인을 두고
탕건노루라 불렀다. 노루처럼 빨라 그런 별명을 붙인 것이다. 나무꾼이 수
시로 도벌을 감행했지만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에게 잡혀 혼쭐이 나곤 했었
다. 지금도 선산은 원시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곧게 뻗은 소나무들로 장관
을 이루고 있다. 선산의 울창한 솔밭은 늘 자부심으로 각인되어 있다.
   집에서 30여 분쯤 차를 몰면 합천호를 만난다. 다시 그곳에서 거창
방면으로 가다보면 호숫가에 선 멋진 소나무가 있다. 합천호의 명품은
물안개와 미인송이라 할 수 있다. 물안개 위로 솟아 오른 소나무는 잘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다. 고요함과 장엄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나무의
크기나 쭉 뻗은 가지를 보면 영락없는 남성의 기개세다. 미인송으로 불
리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두 갈래 가지 중 한 가지가 수면에 닿을 듯한
자태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바라만 봐도 마치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처럼 평온함이 물결 위로 밀려온다.
   사진 찍기를 취미 삼아 여행을 즐겨하는 동료가 있다. 그는 자리를
같이할 때마다 현장을 정물화 그리듯 정교하게 표현했다. 그로부터 합
천호 미인송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해 듣고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미인송이 사라졌다며 통탄을 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년이 지나도 푸르게 살아 갈 것만 같았던 미인송이었다.
왜, 무엇 때문일까? 온갖 상상을 하며 연거푸 폭탄주 몇 잔을 들이켰다.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푸르던 잎이 서서히 황갈색으로 변하더
니 미동도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한다. 생명을 잃었지만 그 자태는 너무
나 고고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엔 환상적인 모습이어서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탄성을 질렀다고 했다. 죽음에 탄성을 지르는 그들이 미워서
일까. 누군가가 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한다. 수면을 향해 몸을 젖힌 그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밟힌다. 근래 다시 미인송을 대신할 소나무를 옮
겨 심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고고함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자태로 자랄
지 알 수 없다. 미인송,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어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더해진다.
   소나무에 얽힌 사연들이 많다. 사육신 성삼문은 <충절가忠節歌>에 소
나무의 기개를 읊었다. 보은의 정이품송은 벼슬까지 하사받은 귀한 몸
이고 삼척에 있는 미인송과 혼례까지 올렸다. 예천의 명물 석송령은 재
산세를 내고 있는 지주이기도 하다. 민족의 혼이 깃든 숭례문, 그 복원에
쓰인 나무가 금강송이다. 죽어서도 명품으로 남는 모양이다.
   최근 세천리의 처진 소나무는 기품이 있어서도 아니다. 수백 년 나이
를 지닌 노송은 더욱 아니다. 세찬 풍상에 아픔을 겪으며 자라다보니
기형이 된 것이다. 보호수로 지정해 달라는 민원이 끊이질 않는다. 주변
에는 멋지게 자란 소나무가 많이 있다. 용연사, 유가사 초입에도 아름드
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달성군청 전정에도 표피에 붉은 기운을 발
산하는 소나무 군락이 하늘을 향해 기개세를 펴고 있다. 싱그럽고 멋진
기품을 지녔지만 관심은 별로인 것 같다. 세상사처럼 뭔가 뒤틀리고 있
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삼 년 전, 집을 짓고 맨 먼저 마당에 삼십 년생쯤 되는 소나무 한 그루
를 심었다. 뿌리와 가지가 잘린 채 새 보금자리로 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다. 거센 삭풍과 예견치 못한 태풍도
견디어야 했을 것이다. 앞으로 더한 풍상도 이겨내야 한다. 잎의 상태로
보아 뿌리를 잘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병충해도 걱정이 된다.
싱싱한 잎을 피워 올리길 바라며 거름을 듬뿍 주었다.
   소나무를 보면 가족들이 생각난다. 아들은 직장을 따라 거처를 옮겼
다. 어릴 적 고향에서 자라긴 했지만 도시에서 학교를 다닌 딸은 마을에
친구가 없다.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가족도 나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를 소망해 보면서 내
마음 안에 튼튼하고 멋지게 자랄 소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서정길  ------------------------------------------------------------------------
2005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