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이라는 단어만큼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더해지니 가슴이 아리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나의 첫사랑
그날도 함박눈이 내렸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 나에게 스케이트를 사
주셨다. 수줍음이 많은 사춘기시절 나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어머니
가 짜 주신 긴 목도리를 하고 친구와 약속한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 스케이트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며 많은 사람
들로 북적였다. 높이 매달아 놓은 확성기에서는 유행가가 크게 울려 퍼
졌고 얼음 위를 신나게 질주하며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
두 행복해 보였다. 처음 스케이트를 탄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친구는 오지 않아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한 남학생이 ‘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와 섰다.
스케이트를 정지할 때 뿌려진 작은 얼음조각이 내 옷에 튀어 나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눈이라도 흘기며 나의 상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힐끗 쳐다보는 순간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 같았다. 얼른 장갑을 벗고 내 옷을 털어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은 더 뛰기 시작했다. 얼굴마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나에게 왜 스케이트를
타지 않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하기 짝이 없고
콧대 높았던 나는 기가 푹 죽었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친구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당당한 목소리로 “친구는 오지 않을 겁니다.”라
고 하며 나를 보란 듯 순식간에 링을 돌아 다시 내 앞에 와 섰다. 내가
스케이트를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내 손에 들린 스케이트를 빼앗
아 신겨주며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겠다고 자청했다. 뛰는 가슴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그의 팔을 잡고 얼음 위로 들어서자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그의 옷자락에 매달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잘해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두 다리를 쭉 뻗고 얼음
위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울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그는 처음이라
그렇다며 한 번 더 해보자고 달래주는 자상함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스케이트를 신고 혼자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배고프지 않느냐고 묻기에 시간을 보니 점심때가 훌쩍 넘
었다.
무심천 뚝방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본정 통에 있는 빵집이었다. 빵
을 시켜놓고 마주 앉아 있으니 그때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엉켜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입은 교복과 이름표를 보니 나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이었다. 내 친구와는 먼 친척이라고 하는 말에 약
속을 어긴 친구가 생각났다. 전화번호와 주소를 묻는다. 아버지의 얼굴
이 떠올라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 손에 쥐어주며 꼭 연락하라고 신신 당부하며 헤어졌다. 그리
고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나만의 비밀 하나가 생겼다.
그때 우리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주택이었다. 대문 옆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고 그 화장실은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사용했다.
화장실에는 5촉짜리 빨간 전등불이 있었다. 간혹 책가방 검사를 하는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나는 그가 준 쪽지의 가장 안전한 곳은
윗 적삼 속 아주 깊은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좁은 공간 5촉짜
리 흐릿한 불빛 아래서 나만의 비밀을 꺼내 보며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다. 좁은 공간이지만 그곳은 한동안 나에게 행복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 갈등과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 행복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어느
날 “왜 집안에 화장실이 있는데 밖의 화장실을 사용하느냐.”라는 어머니
의 말에 그만 가슴이 덜컥, 손때 묻은 낡은 쪽지를 화장실 속으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비밀도 함께 사라졌다.
얼마 전 옆에 사는 친구가 고향엘 다녀와서 하는 말이 자기의 첫사랑
이 우리 동네 ○○은행 지점장으로 부임해 왔다고 했다.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평소 그 친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날부터 친구는 은행
에만 가려면 나를 동행한다. 은행을 들어서는 순간 옷매무새를 만지는
친구가 어느 때는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우스워 보이기도 했
다. 나는 가끔 친구의 첫사랑이 궁금해졌다. 친구에게 “내가 한번 알아
볼까?”라고 하면 친구는 그냥 웃음으로 대답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친
구의 마음이었다. 어느 날 친구를 은행 구석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나는 창구로 달려갔다. 여직원에게 “지점장님 어디 계세요?” 했더니 “네,
전데요.” 하며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놀라서 “아, 예. 아니예
요.” 하며 얼른 은행 문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쉽게 친구의 첫사랑을
만날 줄이야. 친구는 어느새 은행을 나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체구에 머리는 반쯤 벗겨지고 배는 많이 나왔다. 그렇게 멋있다고
얘기했던 친구의 말과는 영 달랐다. 순간 아낙네들이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큰일 났다는 생각에 창피해서 근처 카페로 얼른
숨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쓰디쓴 커피만 연거푸 마셔댔다. 친
구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내가 묻는 말에도 한동안 대답이 없다. 꽤나
실망한 표정이다. 카페 창문으로 슬쩍 비치는 거울 속 우리의 모습이
그날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선
친구는 “에이,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야지. 몸은 늙는데 마음이 늙지
않으니 그게 문제지.”라고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서서 나간
다. 나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었던 그 남학생도 어디서 나처럼 늙어가
고 있겠지. 어쩌면 그날 이후 내 소식을 기다리며 그 스케이트장에서
하얀색 긴 목도리를 한 갈래머리 소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
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간혹 궁금한 적도 있었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
반듯하게 쓴 모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남아있다. 아주 오래된 추억 하나, 나는 그를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이선화 -----------------------------------------------------------------------
2006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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