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신, 이제는 고난도 함정도 지혜로 바뀔 것을 아는 나이인가? 언제나 그렇게 될까?
함정
친구들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산에 오른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응달진 곳에 흰 점처럼 남아 있을 뿐 산 들머리에는 눈의 흔적을 찾아보
기 어렵다. 바람은 단잠을 자고 햇살이 곱게 내리쬔다. 겨울 산이라도
이런 날은 만만하다. 곤두박질치는 수은주에 움츠린 몸을 풀어야겠다.
낙엽이 발목까지 푹 빠진다. 꽁꽁 얼어붙은 계곡물은 햇살의 간지럼
을 견디다 못해 빗장을 푼다. 녹아내리는 물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맨살
을 드러낸 나무들도 굳은 몸을 녹인다. 어린 시절 찬바람을 피해 담벼락
에 붙어 서서 해바라기하는 개구쟁이들을 보는 듯하다. 부인사 뒷길로
해서 ‘삼성암’을 지나 ‘칼날능선’을 돌아 ‘이말재’로 내려올 예정이다. 왕
복 5시간 정도라니 오랜만에 땀다운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몸이
가볍다.
‘삼성암’을 통과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올라갈수록 체
감온도가 낮아지며 산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한다. 된비알이 나타난다.
자신을 호락호락하게 본 대가를 치르라는 뜻인가. 유인작전에 성공했다
고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말수가 줄어들면서 다들 표정이 굳는다. 곳곳
에 수묵화처럼 펼쳐지던 눈이 점점 많아지는가 싶더니 북쪽으로 돌아서
니 종아리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의 발자국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긴장
한 일행은 신발을 조여 매고 아이젠을 신는다. 한 친구가 아이젠을 준비
하자고 했을 때 엄살이 심하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에멜무지로 챙겨 넣
은 것이 다행이다.
몇 발자국 걷다가 아예 주저앉아 미끄럼을 탄다. 눈에 가려져 있던
나무 옹이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겨우 눈밭을 통과한다. 젖은 옷이 시린
줄도 모르고 한고비를 넘기고 나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회색빛 숲 속
에 생기를 불어넣고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눈이 조금 전까지 공포의 대
상이었다니. 끝과 끝을 오가는 두 얼굴이 낯설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주변 여건과 생각에 따라 이중성을 띠고 있으리라. 진중하게 생각해 보
지도 않고 섣불리 판단의 잣대를 갖다 대는 얄팍한 마음이 민망하다.
등성이를 돌아서니 이젠 ‘칼날능선’이다. 햇볕에 잠시 녹았던 눈이 다
시 얼어붙었는지 빙판길이다. 끝을 감춘 구불구불한 길이 뱀을 만난 듯
오싹하다. ‘칼날능선’이란 이름을 괜히 붙인 건 아니리라. 양쪽이 다 절
벽이다.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바위를 붙들고 몸을 움직인다. 툭 튀어나
온 모서리가 허벅지를 찔러도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다. 앞서 가던 친구
가 움찔한다. 바위 틈새로 나온 나뭇가지가 배낭을 붙잡은 것이다. 척박
한 곳에서 삶을 이어가느라 외롭고 심심했던가.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너를 돌아볼 처지가 아니란다. 제발 순순히 놓아주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무언극 배우처럼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후들거리는 다리
는 억지로 지탱하고 서 있는데 꿈결인 듯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는 순간 사태를 짐작했는지 몸을 빠르게 움직인다. 그들은 산행
에 익숙한 듯 지팡이 두 개를 연결해서 가지에 걸린 배낭을 벗긴다. 겁먹
지 말고 침착하게 천천히 가라고 얼어붙은 마음을 풀어준다. 아래서 올
려다보며 감탄했던 마음을 슬며시 감춘다. 하늘은 우리와 상관없이 말
간 얼굴로 무심히 내려다본다. 야속하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
지만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옮
긴다.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마지막에 온 친구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제야 시장기를 느낀다. 김밥과 뜨거운 차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가
던 길을 재촉한다. 푹신한 흙길이다. 주변경치도 구경하며 설렁설렁 내
려가야지 했는데 그런 여유도 주지 않는다. 경사가 90도에 가까운 내리
막길이 버티고 있다. 더 험한 길도 지나왔으니 문제없으리라. 자신을
다독인다. 의지와 상관없이 쉬지 않고 무조건 달려야 한다. 다행히 중간
마다 나무가 있어 양쪽으로 잡으며 속도 조절을 하면 된다. 나뭇가지를
번갈아 휘어잡으며 청룡열차를 타듯 내려온다. 여러 사람의 시달림을
받은 듯 반들반들하게 손때가 묻은 나뭇가지는 이리저리 휘었다. 자리
잘못 잡아 고생이 심하구나 싶었다. 그것도 잠시, 인적 없는 곳에 희멀거
니 서 있는 것보다 고되지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게 보람 있지 않을까.
남의 입장이라고 멋대로 합리화하며 가지에 힘을 싣는다.
처음부터 속을 알았다면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스한 날씨에 그런 함정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산은 무슨 일이 있었
느냐는 듯 온화한 처음 모습 그대로다. 햇볕만이 미안한지 슬슬 뒷걸음
친다. 마음 놓고 가다가 허방에 빠지기도 하고 그 덕분에 고난을 헤쳐나
가는 지혜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겉만 보고 허허거릴 일도 지레 겁먹을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멍 자국이 군데군데 훈장처럼 남아 있다. 검푸른 빛이 점점 연해지니
그날의 두려움도 사그라져 추억이 되고 용기가 된다. 본의 아니게 모험
을 하게 되었으니 멍 자국이 자랑스럽다. 며칠이 지났는데 몸은 아직도
욱신거린다.
백승분 -------------------------------------------------------------------------
≪에세이스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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