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찰제나 거래보다는 덤과 흥정과 같은 생기와 활력으로 대한민국이 채워졌으면 합니다.
시장과 마트
시장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를 넘어 지친 삶
에 활력소가 되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시장에는 모든 물건이 살아
있는 것만 같다. 채소나 생선, 나물은 당연지사고 냄비나, 옷 같은 공산
품에서도 생명력을 느낀다. 장날에 시장 갈 생각을 하면 그 즐거움에
설레기까지 한다. 맥없는 날에도 장터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묘하게도
기운이 솟는다.
오래전에 나는 규격화된 대기업 생활을 견디지 못해 퇴사를 결행하였
다. 퇴직금으로 화물차를 한 대 구입하여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
을 팔러 다녔다. 공판장에서 농산물을 한 차씩 받아 이 장 저 장 돌아다
니는 장돌뱅이가 되었던 것이다. 동트기 전에 나가서 밤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하였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난생처음
겪는 거칠고 험한 세상을 이겨낼 만큼 단련되어 있지 못하였다. 포장만
예쁘게 되어 있을 뿐이지 실상 튼실하지 못한 온실 속 화초였다. 결국,
1년이 채 안 되어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 내가 장터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댈 만도 한데 도리어 장터에 가면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
무엇보다 시장에서는 계절과 삶이 소복이 담겨 있어 좋다. 추레한 시
골 할머니의 서너 개 소쿠리에선 철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움큼
배여 있다. 새벽을 가르며 달려온 생선 장수에게서는 거친 파도를 헤치
며 삶을 낚았던 가난한 어부의 내음이 서려 있다. 삼류메이커인 옷과
신발과 잡화에서는 여린 직공의 가냘픈 손을 발견하게 된다.
시장은 언제나 발가벗겨져 있다. 자신보다 더 예쁜 그림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좋다. 고구마, 감자, 무를 보라. 막 샤워
를 끝내고 싱그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긴 여인의 나신을 보는 듯하다.
산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갓 나온 생명의 기운을 함초롬히 머금은 천연
상태. 냄새도 맛도 다양하다.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는 고소한 냄새, 먹자
골목 선술집에서 나는 달콤한 한 잔의 치명적 유혹 파전 굽는 냄새, 노란
좌판에 꽃을 흩뿌려놓은 듯한 무지갯빛 떡들. 비린내도, 매캐한 냄새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곳. 그래서일까. 시장에 가면 욕탕에 가는 것 마냥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게 되고 가식을 벗어버리게 된다.
대개의 사람은 싱그러운 기운을 받기 위해 피톤치드가 발산한다는 숲
으로 간다지만, 나는 시장에 가야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새벽부터 바지
런을 떨며 청아한 기를 쓸어 담아 온 상인의 활기와 시장에서 풍기는
형형색색 살아 있는 파릇한 생명의 내음과 질퍽한 상인들의 외침에서
싱싱한 기운을 받는다.
시장은 언제라도 고무신에 추리닝 바람이어도 누가 나무라지 않을 것
같다. 이웃집에 마실가는 양 꾸미지 않아도 누가 촌티 난다고 수군대지
않으리. 설령 농주 한 잔 걸치고 흐느적거려도 어머니의 손길처럼 너그
럽게 다독여 줄 것만 같다.
나는 물건 값 흥정을 좋아한다. 깎아 달라고 막 조르기도 하고 덤을
더 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한다. 그런 소소한 실랑이를 즐긴다. 나는 본시
수줍음이 많은 위인인데도 시장에선 넉살 좋은 아저씨가 되어 농을 걸
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해가면서 값을 깎아대는 것이다.
상인이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 흥정하는 손님을 마다하지 않을까 싶
어도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것이 정이라는 것을 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정. 그 짧은 순간에 말이다. 정들고 나면 안 깎아 주려다가
도 으레 인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런 흥정에서 이문이라야 고작 일, 이천
원이요, 한 줌 덤에 불과하다. 나는 얄팍한 이문보다는 그저 그런 대화가
즐겁다. 시장엔 할머니의 푸근한 체온 같은 향수가 있다. 그 향수에 마음
을 내려놓고 싶은 것이다. 아파트 콘크리트 벽에서 잃어버린 이웃과 정
을 나눌 수 있는 곳. 그곳이 곧 시장이다.
누구보다도 소심한 내 성격을 잘 아는 아내는 이런 나의 모습에 처음
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더니 근자엔 아예 시장에 갈 때마다 흥정 전담
대표선수로 나를 앞장세운다.
그러나 실상 아내는 시장보다는 대형마트에 빠져 있다. 공간이 깨끗
하고 모든 물건이 다 있다는 편리한 이유 때문이다. 아내는 마트에만
가면 신바람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쩌다 도회지에 갈 일이 생기
면 시골내기 아낙인 아내의 일 순위 희망 사항이 백화점 구경이다.
나는 대형마트나 백화점엔 생명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곳은 현
란한 도형이 그려진 비닐 포장으로 주검을 살아 있게 위장해놓은 듯하
다. 마치 생명을 위장시킨 박제된 짐승을 보는 것만 같다. 막 살아 움직
일 것만 같은 채소 판매대마저도 가공 수증기로 분사하여 싱싱함으로
포장한 조화造花처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단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금세 녹초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트엔 오만가지 물건이 넘실대지만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곳엔 흥
정도 없고 덤도 없다. 그저 거래만이 있다. 대화할 일이 별반 없다. 그러
니 마트에 정情이 있을 턱이 없다. 코너 물건마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공해를 뿜었던 공장의 시커먼 굴뚝이 보이고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음이
요란스럽게 들린다. 춘하추동 완벽한 냉난방 장치와 태양을 대신한 밤
낮 없는 화려한 네온등이 계절을 앗아가 버린다. 마트엔 언제나 계절이
죽어 있다. 새벽의 신선한 기운도 없다. 냄새마저도 가공되어 풍긴다.
화학 탈취제와 방향제로 골이 지끈거릴 정도이다. 덕지덕지 진하게 화
장을 한 여인 같다고나 할까.
마트 정찰제 명패는 내 얄팍한 지갑을 비웃으며 선택을 강요한다. 그
래서일까. 마트엔 왠지 반듯한 옷차림으로 가야 할 성싶다. 장터에 가는
양 느긋하게 갔다가는 뒤태가 가렵다. 술 한 잔 걸치고 흐느적거리다간
영락없이 쫓겨나기 십상이리라.
그럼에도, 묘한 것이 아내는 마트에 가면 힘이 솟는다고 한다. 알다가
도 모를 일이다. 나는 으레 시장에 가야 기운이 나는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성향이 다른 데도 아들딸 낳고 잘사는 것을 보면 용하다 못해
경이롭다. 아내는 번쩍번쩍한 아파트에 살기를 원하고, 나는 시골에 흙집
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살고 싶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도시이며,
반듯하고, 규격화되고, 편리한 삶을 바란다. 한복을 입고, 조금은 투박하
고, 덜 정형화된 삶을 바라는 나와는 정 반대의 삶이다. 이토록 성향이
달라서야 원, 부부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트나 재래시장이나 똑같이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곳이다. 마트에 없는 것은 시장에 있고, 시장에 없는 것은 마트
에 있다. 삶은 분명 다름이 존재하는 곳이다. 나와 다르다 해서 배척할
게 아니라 다르므로 실수투성이의 나를 보듬을 수 있다. 서로서로 인정
하고 부족한 점을 채우고 포용할 때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을까.
아내와 나는 모든 게 다 다르다. 그러나 가장 큰 다른 점으로 말미암아
남남이 아닌 ‘우리’로서 사는 것 같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나
를 사랑한다는 가장 큰 다른 점. 바로 그것 하나 때문이다.
이순종 ------------------------------------------------------------------------
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
명언에세이: ≪내 마음속 99개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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