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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봄의 소리를 듣다 - 정정예

신아미디어 2012. 5. 25. 18:01

순식간에 봄을 지나 여름이 되어 버렸네요. 정정예님의 수필을 통해 다시 한번 봄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봄의 소리를 듣다


   지난 가을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이 후드득후
드득 나무 발등께로 죄다 떨어져서 쌓였습니다. 커다란 나무에서는 아
기씨앗 하나가 땅바닥으로 톡 또르르 떨어졌어요. 작은 씨앗 하나가 엄
마 손 놓쳐버리고 만 것처럼 보입니다. 씨앗은 나뭇가지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커다란 나무가 떨어진 가랑잎을 조용히
쓸어 모아서 아기씨앗이 포근히 잠잘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심술궂은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습니다. 아기씨앗의 몸을 툭툭 건드리
고 귀찮게 굴었습니다. 장난꾸러기 바람이 불어와서 아기씨앗의 몸이
자꾸만 흔들거렸습니다. 씨앗은 곰곰이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
떻게 하면 자신의 몸을 흙 속에다 잘 숨길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씨앗은 자신의 몸에다 힘을 꽉 주었어요. 씨앗은 조금씩 흙 속으로 스며
들었습니다. 아기씨앗은 더욱 힘껏 몸에 힘을 줍니다. 참느라고 이마에
땀방울까지 방울방울 맺혔지요. 몸이 점점 보이지 않게 흙 속으로 가라
앉게 되었습니다. 아기씨앗은 이제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정말 끄떡없게 되었지요.
   엄마나무는 자신이 벗어놓은 옷을 아기씨앗의 이불로 꼭꼭 눌러 덮어
주고 토닥여 주었습니다. 바람은 더 이상 아기씨앗을 찾을 수가 없는가
봅니다. 바람은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졌습니다. 심술궂은 바람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도 이제야 안심할 수가 있었습니다.
옷을 다 벗은 나무가 이제는 서서 잠을 자려고 천천히 눈을 감아봅니다.
엄마나무는 아기씨앗이 곤한 잠을 잘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자장가를
불러주며 엄마나무도 깊이 꿈속으로 빠져듭니다.
   자장가 노래는 엄마나무 뿌리 밑으로 고요하게 울려 퍼져 나갔습니
다. 아기씨앗은 엄마나무의 사랑과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행
복했습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두운 땅속이지만 씨앗
은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흙 속이 포근
하고 참 따스했습니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면서 하품이 나오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아기씨앗은 얼마만큼 깊은 잠을 잤을까요? 씨앗은 크게 기지개를 폈
습니다. 조금씩 몸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안하게 누웠던
곳이 비좁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은 오지 않습
니다. 어두웠던 곳에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환한 빛이 들어옵니다.
몸이 근질거리더니 아기씨앗은 입에서 줄줄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지낼 순 없어, 내 몸이 점점 커져가니 이
어두운 곳에서는 내 꿈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없어!’
   씨앗은 마구 몸부림을 쳤습니다. 팔다리를 힘껏 내저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땅에 둥글려 보기도 합니다. 씨앗의 몸통이 점점 자라서 몸에
근육도 생겨났어요. 굵어진 몸통을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려 보았습니
다. 넓은 세상에 나가면 무엇이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봅니다.
   ‘으라차차’ 팔과 다리에도 제법 알통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밖의
세상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를 잘 기다려야 하니까요.
몸속 어디선가 엄마나무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기씨앗은 오늘이 무슨 날일까 하고 깜짝 놀라서 달력을 보았습니
다. 그동안 달력을 보는 것도 잊은 채 잠만 쿨쿨 잤거든요. 잠에서 깨어
나자마자 운동만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날짜 가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
니다.
   ‘아! 내가 이렇게 잠꾸러기처럼 잠만 잤다니 큰일 났네.’
   자신이 게을렀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
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생각났어요. 세상에
태어난 것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는 말이 또 생각났지요. 좋은
나무가 되려면 또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엄마나무로부터
배운 적이 있었으니까요. 엄마나무가 일러준 말이 가슴속에 꼭 새겨져
서 생생한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어요. 아기씨앗은 잠시 생각에 잠겼
습니다.
   저 넓은 세상에 나가면 어떻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까 하고 말이지
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침착하게 계획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흙을 밀어내고 올라가야 하는 것을요.
   아기씨앗은 후우 하고 한번 크게 숨을 쉬어봤어요. 제법 의젓해 보였
어요. 씨앗의 몸이 점점 커지고 부풀어 올라서 금방 터질 것만 같았습니
다. 머지않아 세상을 다 채우고도 남을 것 같은 꿈도 생겨났어요. 씨앗은
그 꿈을 꾸면서 저절로 두둥실 하늘로 솟구칠 것만 같았어요. 잔뜩 오그
리고 있었던 다리가 쭉 펴졌습니다. 몸이 위로 쑥 밀어 올려졌어요. 갑자
기 무거웠던 머리가 시원하고 상쾌해졌습니다. 무거운 흙을 밀쳐내고
고개가 저절로 쏘옥 내밀어졌어요.
   ‘아이 눈부셔라!’
   반짝이는 파란 하늘이 예뻤습니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도 아름답습
니다. 여기저기서 쏘옥 새싹이 돋아나는 즐거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선가 “아가야 잘 잤니?” 하는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엄마나무가 웃으면서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엄마나무 주위에는 다른
형제들도 어여쁜 새싹을 틔우고 엄마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습
니다. 지난가을에 떨어졌던 아기씨앗들이 고스란히 튼실하게 자라난 것
입니다. 엄마나무가 흐뭇해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아기 새싹들도 덩달
아 흥얼거리며 엄마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커다란 나무들이 아기새싹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새싹들
은 기뻐서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났습니다. 떡잎도 자라서 넓게 퍼져갔
어요. 하룻밤만 자고나면 몸통도 이만큼, 키도 이만큼 자랐으니까요. 새
싹들의 발밑이 간질간질거려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웃음을
참아 보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곳저곳에서 “까르
르 깔깔깔” 웃는 소리가 합창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새싹의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땅 밑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소리예요.
   요즘은 개구쟁이 바람이 아기나무한테 자주 놀러오고 있습니다. 한
때는 못살게 굴고 몹시 괴롭혔던 바람이었는데 아기나무는 다 용서하기
로 마음먹었습니다. 바람은 아기나무 가지에서 거꾸로 매달려서 놀다
가, 걸터앉아 놀다가 해가 지면 슬그머니 저희 집으로 돌아갑니다. 개구
쟁이 바람은 아기나무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지난가을 땅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던 아기씨앗이 이렇게 좋은 나무가 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엄마나무는 아기나무들을 바라볼 때마다 정말 기쁩니다. 아기나무들
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을 생각하니 행복했습니다. 아기나무들도 좋은
열매를 맺는 엄마나무 곁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엄마나무 아기나무 모
두 손잡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작은 씨앗은 생명이 되고,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
를 맺고.”
   이처럼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물 속에서 봄은 언제나 새롭게 태어
나고 있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봄 속에 앉은 나는 봄의 이야기를 들으며
봄을 한 소쿠리 가득히 캐어내고 있습니다.

 

 

 

정정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