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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역사기행수필 연재] 남도기행 : 아! 빛고을 - 황인용

신아미디어 2012. 5. 29. 19:14

수필과 비평에서 연재되고 있는 역사기행 수필을 소개합니다. 황인용님과 함께 "빛고을"을 즐겨보세요.

 

 

 

   남도기행

      - 아! 빛고을

   대원군은 호남을 풍전세류風前細柳의 고장으로 정의했다. 유장한 산천
과 곡진한 인정의 미칭美稱이었다. 버드나무는 미풍에도 미묘하게 하늘
거린다. 한아閑雅롭고 멋들어진 풍정風情의 나무다. 곧 풍류의 상징목이
다. 달리 호남이 풍류의 본고장이겠는가 싶다.
   버드나무는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적응력을 자랑한다. 바로
외유내강한 남도인의 표상이다.
   무등산이 또한 외유내강한 남도인의 표징이다. 원융무애의 화신이지
만 입석대立石臺처럼 칼끝 같은 바위기둥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천 미터가 넘는 산이 백만 명 도시에 솟은 경우는 광주가 세계 유일이
다. 그 품안에서 오롯이 16년 학창시절을 보낸 추억의 산!
   못재굴을 지나면 하늘의 종 같은 무등산이 돌연히 시야에 뛰어들어온
다. 서양의 종은 궁륭, 즉 하늘의 모양이라던가?
   교수신문이 정한 작년의 사자성어가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다. ‘실용失
用’주의자일수록 귀 막고 종 훔친다는 설명이었다. 명진 스님의 서이독
경鼠耳讀經은 쥐 연작편의 백미편이자 완결편이 아니었으랴?
   무등산은 30리 떨어진 송정리 옛집에서도 정광淨光중학교 아까시숲
너머로 광배光背 같았다. 돈오하겠거니 무등산이 바로 광산光山임을!
   하필 빛고을에 시대의 어둠이 도저하게 깊어야 했던가? 웨인 다이어
에 따르면 모든 문제엔 영적인 답이 있다. 어두운 곳에 빛을 초대함은
문제 있는 곳에 영적인 답을 가져옴과 같다.
   빛은 어떻게 불러오는가? 답은 간절한 염원이다. 감광성感光性이라면
빛고을 사람들보다 천부적인 이들이 어디 있으랴? 하늘은 광명의 원천
으로 삼기 전에 빛고을을 암흑에 빠뜨렸음이 아닐 수 없다.
   빛고을은 명실상부하게 인권과 평화에 관한 한 세계적인 영감의 도시
로 찬란히 부활 중이다. 특히 험난한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 동남아인
들의 성스러운 순례지다. 광명의 부처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불함
은 시도 때도 없는 일과라는 사실이다.
   ‘무등산無等山’은 무등지등無等之等의 줄임말로 불교와 도교식 이름이
다. 최상의 산을 가리키나 평등의 뜻으로 의미부여한 이가 신영복이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가려 할 제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호남가>의 서두지만 호남은 자고로 대동, 즉 ‘함평咸平’의 천지였다.
빛고을이 세상에 전할 광명의 전언도 모두가 평등한 ‘함평천지’가 아니
랴? 무등산의 무량한 전망도 위대한 평등의 목적目的, 즉 평등의 희망希望
이 아니라면 언어도단이리라.
   윌킨슨과 피킷이 쓴 ≪평등이 답이다≫의 원제는 ‘수준水準 측량기’다.
공사할 때 가장 중요하느니 수평을 잡는 일이다. 건물이 기운다면 어찌
되겠는가? 하물며 나라가 한쪽으로 반세기 동안이나 기운 경우에서랴.
그렇듯 가난보다 치명적이느니 불평등이라는 탁견이었다.
   소득불평등이 세계 2위인 미국은 범죄율과 정신병자 비율이 아주 높
은 나라다. 폭력이 만연한 불신사회이기도 하다. 반면에 불평등지수가
낮은 스웨덴은 미국과 정반대인 복지·행복국가다.
   “나라 가난함을 걱정하지 말고 평등하지 못함을 근심하라.”
   공자는 수천 년 전에 신자유주의의 파국적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아닐 수 없다.
   시내로 들어서자 ‘열독률 1위 신문 한겨레’ 펼침막이 반긴다. 한겨레
신문 현관에는 6만 명 창간 주주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빼곡하다. 거
기서 ‘황인용’ 석 자를 발견했을 때의 감회가 새삼스럽다.
   한겨레는 약자의 편에 서는 정의의 신문이다. 민주시민의 성금으로
창간된 신문으로 세계 유일이다. 약자가 사는 길은 약자끼리 연대함뿐
이다. 약자의 글쓰기는 요산樂山 선생의 말씀처럼 저항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약자를 적대시하는 조선일보는 5·18을 공산 폭도의 난동으로 매도했
다. 최근에는 김정남과 일본 신문의 전자우편을 소개하면서 “천안함은
북한 소행임을 인정했다.”라고 작문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받아 사설로
썼다가 함께 망신살이 뻗었다. 이처럼 독자들은 수구신문에 날마다 속
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촛불이며 희망버스에 불법 폭력의 딱지를 덕지덕지 붙였다.
강자를 편들기 위한 상징조작, 즉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언어폭력임은 물
론이다.
   희망버스를 탄 이들은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그 먼 길을 가지 않았다.
불법 폭력 시위를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동지가 죽자 몇
년 동안 냉방에서 잔 김진숙에 감동해 땅바닥에서 날밤을 새울 만큼 양
심적인 민주시민이었다. 송경동 시인과 김근태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를 응원하러 간 정의파였음이다.
   과연 ‘법과 질서’는 만능의 처방전일까? 오늘날 법은 기득권 세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서기호 판사 해임은 우리 법의 퇴영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으니 말이다.
   군사독재시절 수구신문은 ‘거리질서 지키기 운동’에 열심이었다. 김상
봉 같은 뜻있는 이들은 ‘싸구려 도덕’ 또는 ‘노예 도덕’이라 비웃었다. ‘거
리질서’는 군사독재의 근본적인 죄악을 외면하기 위한 지엽말단적인 불
순한 목적이었음이다.
   웨인 다이어는 불순한 생각이 사회를 오염시킨다고 말한다. 어둠은
속임수의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수구신문의 불순한 의도는 나라를 얼마
나 오염시켰겠는가? 그들의 속임수에 놀아남은 자신과 사회를 암울케
할 뿐임에랴! 돈 받고 관제 시위에 동원되는 단체의 우국충정에 감동하
는 일을 포함해서 말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붙
임은 공산당식 사고방식의 전형이 아니던가?
   이러한 세상의 어둠을 몰아냄에 헌신함은 빛고을에서 학창시절을 보
낸 자의 행복한 고역이다. 여기서 고역은 고역孤役의 뜻도 있다.
   버마에서 순직한 일본의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는 누군가 가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누군가는 (날카로운 글을) 써야 합니다.”
   서정환 발행인의 말씀은 누군가는 악역을 자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악역이 악독할수록 영화가 성공한다고 말한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
독이 떠오른다.
   선악이라면 세상은 기득권을 끝없이 확대하려는 강자와 생존권을 사
수하려는 약자의 투쟁이 전방위로 벌어지는 곳이다. 이때 약자의 편에
서야 4대 성인이 말한바 억강부약의 정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억강
부약 아니면 정의가 결코 아님이다.
   오불관언한다면 행동하지 않은 양심으로서 악의 편일 따름이다. 정직
한 채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들고 나온다면 어떨까? 이는 수구신문이
공평한 척 위장하면서 강자를 편들어온 최상의 방법론이었다.
   마각馬脚이 폭로된 지금은 공산당식 새빨간 거짓말에 여념이 없다. 그
러한 폭력문화의 전도사가 따로 없다. 학교폭력 근절도 수구신문 거세,
환언하면 친일파 청산이 궁극적 관건임에랴.
   수구신문은 방송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궤멸적 손실을 보고 있다.
   “방송 진출 안 하면 천천히 죽고 진출하면 빨리 죽는다.”
   이렇게 말할 만큼 그들도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도박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은 서울시
주민투표와 붕어빵인 것이다.
   자승자박, 인과응보 그리고 사필귀정!

 

 

황인용  ----------------------------------------------------------------------------
1991 월간 ≪에세이≫ 천료. 1994 한국어문상 수상. 1998 ≪수필과비평≫ 수필평론 당선.
2007 신곡문학상 수상. ‘한글+漢字문화’ 지도위원.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