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권두수필] 백남준의 정직한 열광 - 홍혜랑

신아미디어 2012. 5. 11. 14:59

수필과 비평의 5월호를 여는 홍혜랑님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예술은 사기'라는 백남준님의 말.....

그 말이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열정과 노력이라는 그리고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백남준의 정직한 열광


   백남준의 예술이 그토록 세계인의 관심을 끌며 경이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지만 호락호락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접고 넘어갔
었다. 모든 예술창작품이 그렇겠지만, 전위예술만큼 많은 사람들의 서
로 다른 해석관점에 휘둘리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
석의 정답은 없다.’는 관점주의 또한 전위예술에서 만큼 너그러운 곳도
없을 것 같다. 그 너그러움이 나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인 여류수필가의 책을 받아 읽으면서
우선 두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따라 동행하다 보니 평소 내 경직된 안목
이 얼마나 성숙하지 못했었는지 부끄럽기까지 했다. 우정이면 우정, 사
랑이면 사랑, 호의면 호의 딱 부러지게 획을 긋는 것이 인간 모습에 충실
한 삶인 줄 알았었다. 생각해 보면 무지개가 어디 일곱 가지 색깔이던가.
일곱 색깔 사이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중간색들에겐 아무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 그들은 일곱 가지 이름 어딘가에 편입되어 있을 뿐
이다. 무지개색보다 더 많은 간색間色으로 혼합된 것이 사람의 마음, 사
람의 정신 아닐까. 그 느낌이 전위예술에 대한 나의 관심을 불러내는
데에 한몫했을 것이다.
   “예술은 사기”라고 말한 백남준이 그렇게 큰 목소리로 고백하지 않고
는 배길 수 없는 ‘거짓’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 의문이 내 안에서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여류수필가의 책도 책이지만, 나 또한 스스로의 글쓰기
를 점점 의심쩍게 보면서부터다.
   백남준 예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 존 케이지는 <4분 33초>
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4분 33초 동안 무대 위에서 아무런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침묵의 연주다. 어떤 해석자는 침묵 속에서 오히려 관중
은 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소리와
침묵을 가르는 분별심을 놓아버린 선禪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백인백색의 해석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침묵의
그 무대를 전위예술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있긴 있을 터다.
   피아노를 때려부수던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아직도 국내에서는 ‘인습
과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강렬한 발상’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백남
준이라는 이름을 빼면 그건 미친 짓’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에 가보니 악기를 철
조망으로 칭칭 감아놓질 않았나 소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놓질 않았나
미친 짓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있었다. 어느 해석에 줄을 서야 작가의
정신세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조바심할 겨를이 없었다.
예술의 대상이 어떻게 이토록 한계가 없을 수 있을까, 이런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고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길들여
져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예술작품 또한 일상적 우연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일상성의 틀을 부수고 나와서 자연과 만나려는 몸짓은 예술가의
생명 같은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의 정신이 아직 손대지 않은 있는 그대
로의 땅이다. 그 땅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으며 땅의 크기는 내
영혼의 절대치와 동일하다. 영혼의 서치라이트를 멀리 비추면 비출수록
땅도 넓어진다. 우리들 문인은 원고지 앞에 앉아 그 불모지의 문을 두드
리며 밤새도록 피 말리는 언어적 표현을 찾는다. 언어만으로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함을 절감한 백남준은 몸으로,
기계로, 행동으로 이 세상 만물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맸고 그 여정에서
생겨나온 것이 그의 설치예술, 행위예술 아니었겠나.
   그 어떤 천재예술가도 자연 속에서 포착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
내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
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는 깨달음을 가장 체험으로 만나는 사람이 예술가
가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앞선 열정의 주인공이 전위예술
가라면, 기행이든 파행이든 그들의 표현은 인간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그만큼 확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에 대한 백남준의 정직한 열광은
“참으로 인간은 넓어.”라고 절규한 도스토옙스키의 고뇌를 떠올리게 했
고, 몽골초원을 떠나 종횡무진 말잔등에서 지구를 누비던 칭기즈칸의
노마드적 행보를 연상케도 했다. 같은 유목민 백남준의 신기神氣가 예술
이라는 초원에서 때를 만났고 세계인은 그의 예술에 주목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예술의 아방가르드 사조가 인간의 이성, 신의 절대
력에 대한 해체라면, 이미 인식된 것에 대한 해체는 전위예술가들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
하는 노력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멈춘 적이 없다. 역사 속에서
고전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등 시대의 이름이 바뀌는 것은 인간의 얼
굴 한쪽 면에 초점을 맞춘 결과다. 그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어도, 볼
수 있는 건 언제나 한쪽 측면뿐이라는 것이 인간역사의 한계다. 가끔
인간영혼의 막장까지 내려간 사람이 ‘여기 또 다른 인간정신의 광맥’이
있다고 외치기도 하지만, 그가 시대의 이해를 받으려면 적어도 반세기
이상 지하에서 기다려야 하는 역사를 우리는 가까이 니체 같은 철학자
에게서 만난 적이 있다.
   존재론적 인간탐구라는 명제에서 보면 목적론적 사유에 사로잡힌 고
전주의보다, 개인의 주관적 감성에서 가장 인간다움을 발견한 낭만주의
보다 그리고 그 무슨무슨 주의의 정형보다 오히려 인간존재를 미정형으
로 남겨놓은 채, 끊임없이 영혼을 채굴해 내는 전위예술이 인간의 본래
생김새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전위예술이라는 어휘는 시간적 공간적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영혼의 신대륙을 찾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역동
적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그 어느 시대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는 전위예
술은 시대와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시야에 들어오
지 않는 또 다른 존재의 지평에 눈이 닿아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하면 목적없이 시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겉멋 들린 아류
쯤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변방으로 제쳐놓던 내가 이제 중심을 잃고 아
주 초라하게 변방에 서 있는 느낌이다. 달랑 원고지 한 장 들고 글을
쓰겠다고 덤벼드는 나는 인간을 알기 위해, 나를 알기 위해 충분히 혹독
하게 방황했던가. 전위예술가 백남준이 아니라 인간 백남준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예술은 사기’라는 선포는 전위예술가들끼리의 선문답이 아니라 그 무
엇으로 표현해도,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명멸하는 혼돈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절망의 표현 아닐까 짐작해 본다. 자연과 소통하기 위해서 영혼
의 망망대해를 목숨 바쳐 항해해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전위예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래저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아니었나
싶다.

 


홍혜랑  ------------------------------------------------------------------------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독일 마아부르크 대학에서 현대독일어 전공.
경희대, 고려대, 서울여대, 한국외국어대 등에서 독일어 강의.
≪에세이문학≫ 기획위원, 수필문우회 운영위원,

한국비평문학회,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에세이집: ≪이판사판≫, ≪자유의 두 얼굴≫.
선집: ≪문명인의 부적≫.
제26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