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민님의 그림이야기에 이은 신화이야기를 『수필과 비평』에서 소개합니다. 즐거운 상상을 약속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자는 누구인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이육사 <광야>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육사의 시처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면서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이 처음 열리기 전의 우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우주의 모습은 인간의 환상 속에
서만 존재할 뿐이다.
환상은 인간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문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무한히 넓은 우주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인간에게는 우주에 관한 환상이 신화라는 형태로 나
타났다. 환상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화적 모습은 지역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심지어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다. 왜냐면 실체적 경험이 아니고
환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화에서 나타나는 우주적 진
리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또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나타나는 것
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융은 신화에 나타나는 우주적 원리를 이렇게 말하
였다.
“꿈속에서(환상이라는 의미) 우리는, 태초에 밤의 어둠 속에 살고 있
는 좀 더 보편적이고, 진실하고, 영원한 자의 초상이 된다.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자연과 구분할 수 없으며, 모든 자아를
벗어버린 상태이다. (즉 인위적으로 만든 법이나 도덕 같은 인간의 질서
를 벗어나서 자연의 질서와 통합된다는 뜻이다.) 꿈은 자연과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어서 나타난 세계이다. 인간의 질서가 만드는 현실 세계
에서 벗어났으므로 유치하고, 기괴하며, 인간 세상의 가치인 도덕 따위
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피어나는 꽃처럼 솔직하고 진실하다. 가면
을 하고 사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꿈이나 신화는 현실의 삶을 벗어난 세계이므로 훨씬 더 근
원적이고(본능적이라는 뜻), 근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화의
세계에는 원초적인 창조와 생산을 담당하는 역할을 여신이 한다. 어머
니 신화가 만들어진다. 융은 여신을 연구하여 어머니 신화가 우리의 삶
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혀냈다.
“모신은 세상의 초자연적인 근원으로서 우리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기 이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까마득한 인류사에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보편
적으로 경험한 것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흔히 본능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로부터 배를 채우는 음식물과 따뜻한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어머니에게 기대어서 나의 안전과 평안함
(향락)을 얻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인류사의
초기부터 되풀이하여 경험하였던 사실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은 무의식
에 각인된 인간의 사유세계이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고착되어 있다. 유아기 때 경험하였던 어머니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신과 다름아니라고 인식한다.”
유아기를 지나면 어머니의 존재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친
다. 끊임없이 금지를 하고 벌을 주는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것을 만지
면 안 된다.” “어머니를 엿보면(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너의 페니스(성
기)를 거세해 버릴 거야.” “이제는 그만 놀고 잠을 자야지.” “아버지에게
대들고 상말을 쓰면 벌을 받아.” 어머니의 금지와 위협은 끝이 없다. 위
협하고, 벌은 주는 어머니의 나쁜 모습도 좋은 어머니 못지 않게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다.
고대의 여신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이 가지고 있다. 그것
이 가장 솔직한 어머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헤라, 아프로디테, 칼리 여신은 어머니의 양면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융 연구가인 에리히 노이만은 그의 저서 ≪위대한 어머니, 원초의 연
구≫(1963)에서 어머니를 의미하는 상징에 대해서 방대한 연구를 하였
다. 그는 “어머니의 상징은 홀로 존재하는 위대한 여신의 모습, 다시 말
해서 지상이나 천상에서 아버지가 나타나기 전에 존재하였던, 구석기인
들이 받아들였던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쩌
면 이때는 자녀의 출산에 남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고 하였다.
아버지가 나타나기 이전의 태초의 신을 우리는 그리스 신화의 태모신
인 가이아에서 찾을 수 있다.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神統記(Theogony)>
에 의하면 카오스(혼돈)가 가이아(땅)를 낳고, 가이아가 에로스를 낳았
다고 하였다. 헤시오도스가 환상을 통해서 바라본 신화의 세계에서는
카오스가 제일 먼저 나타난다.
‘혼돈’이라고 말하는 카오스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역시
환상의 문을 통해서 들여다보고 나서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밀턴은 이것을 인용하여 ‘처음에는 혼돈만이 있었다. 그것은 측
량할 길이 없는 거대한 심연, 다만 어둡고 황량하여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라고 표현하였다.
태초의 우주는 아무 것도 없는 무존재의 상태가 아니고 적어도 어둠,
땅, 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5왕조의 파라오인 우니스의 피라
미드 내부에 새겨진 피라미드 문서에 의하면 태초의 흑암 속에 잠잠하
고 무한한 바다가 있었다. 태초의 바다 눈(Nun)에서 최초의 신 ‘아톰’이
솟아 오르면서 천지를 창조하였다. 혼돈의 바다 ‘눈’을 창조 이전의 우주
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창조에 관여하는 자는 하느님과 아톰이다. 하느
님과 아톰의 성별에 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이미지로 느껴오기로는
남성이다. 남성의 신이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우주에는 어둠이나 땅,
바다 등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요소들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하였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말하는 가이아는 창조 이전의 근원적인 요소
중에서도 땅이 가장 중요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
신화에는 창조의 개념을 가진 여러 신화들이 있다. 그러나 가이아가 제
일 유명하다.)
카오스라는 말에서 ‘카’의 뜻은 ‘크게 입을 벌리다’라고 하였다. ‘틈’을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하였다. 즉 우주가 생성되는 순간에 이미 땅은 만
들어졌고, 틈(입벌림-대기의 뜻이 아닐까?)이 생겨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이아는 땅을 인격화한 여신으로서 처녀생식을 통하여 우주의 주요
한 요소들을 생성해 낸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땅으로부터 생겨
난다는 인류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대지의 신인 가이아는 단성생식
으로(배우자 없이 즉 처녀생식으로) 천공신인 우라노스를 낳아서 남편
으로 삼는다(오늘의 개념으로 보면 자식을 남편으로 삼았다. 고대 신화
에 무수히 나오는 이야기이다. 즉 인간질서가 형성되기 이전의 이야기
▲ 고야의 그림-우라노스가 아들을 잡아 먹는다.
(거인족 신은 모신 계열의 원시신이다.)
로 이해하면 된다.). 이외에도 단성생식으로 폰토스(바다의 고대신)와
신들을 낳는다. 하늘과 바다와 산이 땅에서 생겨난 것이다. 처녀생식
또는 단성생식이라고 부르는 창조 방식은 이후 종교에서 신성을 부여받
았다.
이후로는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결합하여(이때부터는 단성 생식이 아
니고 양성생식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거인족인 티탄족의 형제와 자매
12신을 낳는다. 아들 중의 막내가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잘
아는 제우스를 비롯하여 올림푸스 신족의 12신을 낳는다. 세계의 곳곳
을 여행하다 보면 민속신 중의 특정 여신을 ‘신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본다. 각 지역마다 가이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토속여신이
수없이 많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결합하여 티탄족의 12신 이외에도 악마적 요소
를 갖고 있는 6신을 낳는다. 우리는 흔히 이들을 ‘괴물신’이라고 부른다.
괴물신의 특징은 우리와 형태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우리와 삶
이나 사고, 또는 외양에서 차이가 나면 악으로 몰아버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류사에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나타난다. 괴물신은 한편으로
어머니의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대표적인 신이 외눈박이인
퀴클롭스이다. 아버지는 괴물 아들에게 너무 실망하여 이들을 땅속 깊
숙한 곳에 있는 무한의 지옥 타타르토스에 떨어트리고 문을 잠가 버렸
다. 땅은 가이아이다. 어머니의 몸속으로 도로 넣어버렸으므로 가이아
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어머니인 가이아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아들을 불러서 사악
한 아버지를 처벌하라고 부추겼다. 가슴속에서 돌도끼를 꺼내서 아들에
게 건넸으나 아버지를 두려워한 아들은 모두 도망을 가버렸다. 막내인
크로노스가 돌도끼를 받았다. 밤이 깊자 아버지의 생식기를 돌도끼로 잘
라서 바다 한가운데 던져 버렸다. 생식기에서 흘러나온 피는 곡물의 신이
되었고(피가 생명을 상징하는 것도 보편화된 믿음이다), 바다를 떠돌아
다니던 생식기는 흰 거품이 되었다. 흰 거품에서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가 태어났다. 미는 거품이라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우라노스가 거세 당한 후에는 땅인 가이아와 결합하기 위하여 다시는
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과 땅의 분리는 신화에서 여러 가
지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집트나 인도 신화에서도 비록 이야기의
내용은 다르나 땅과 하늘의 분리를 비중있게 다룬다. 더군다나 ‘거세’는
인류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심층심리인
무의식을 바로 ‘거세’로 이론화하였다.
우라노스를 제거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이 자기를 살해할까봐
두려움에 떤다. 크로노스는 자식이 태어나는 대로 모두 삼켜버린다. 막
내로 태어난 제우스는 어머니인 레아가 크레타 섬의 동굴에 감추어 생
명을 건졌다. 땅속의 지옥에 가두어 두었던 퀴클롭스도 어머니인 가이
▲ 페르가몬 신전(제우스신전)의 조각-제우스가 거인족 티탄족
을 무찌른다. 티탄은 다리가 뱀의 모양이다. 모신계열이다.
아가 풀어준다. 아버지가 토해낸 제우스의 형제들도 제우스를 도
와서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없앤다. 퀴클롭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기인 천둥과 번개도 제우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것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원초적 세계는 막을 내리고 제우스
시대가 도래하였다.
크로노스 시대는 자식의 형제들에게는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고
난의 세월이었지만, 일반 신들은 전쟁도 없는 평화의 시대라고 하
였다.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땅에서는 곡식이 저절로 자라서
식량이 풍족하였고, 근심 걱정 없이 보냈던 시대라고 하였다. 헤시
오도스는 크로노스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하였다. 유토피아가 공
간적인 의미로 어떤 지역을 이상향으로 삼았다면 황금시대는 역사적으
로 존재하는 어떤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크로노스
시대의 신들처럼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았던 시기를 지칭한다. 크로노
스 시대라는 시간성을 말하지만, 환상의 창문으로 들여다본 세상이므로
인간이 꿈꾸는 세계일 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향이다. 성
경에서 말하는 에덴 동산이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황금시대 사상
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시간 앞에서 맥없이 사라져가
는 현상을 말한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시간으로 경쟁해서 이길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은 파괴만을 일삼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새로
운 문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태초의 신인 가이아는 남편과 관계, 남편과 자식과 삼각 관계 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가이아는 고대의 원시신이 지녔던 이중
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융이 주장하는 오늘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이중
성의 원형이기도 하다. 신의 계보에서 가이아족들은 제우스로 대표되는
올림푸스 신족에게 퇴치당한다. 이것은 동물적인 삶을 살던 인류가 거
세로 상징되는 인간의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거세는 서양식 이
성주의 질서로 재편송하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라고 한다. 이성의 중심
이 바로 천신이고 남신인 제우스가 있다. 모계에서 부계로 바뀌는 과정
을 말하기도 한다.
이 신화는 심리적으로 오이디푸스 갈등이라고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아버지의 살해라는 모티브를 보여준다. 이 모티브는 전 세계에
신화적 요소로 퍼져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억압의 모티브이다.
신화는 욕구를 충족시켜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도 한다. 고대
의 지하 세계에는 수많은 지옥의 신들이 살고 있었다. 정신분석가들은
그것을 저열하고 악마적인 심리상태가 육화되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
였다. 말하자면 고통과 미움, 적개심과 인색,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인간
의 한 면이 악마적 실체로 상징화되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
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이 투영된 환상의 그림자들이다.
이동민 ----------------------------------------------------------------------------
1992년 ≪수필문학≫에서 천료.
1998년 ≪수필과 비평≫ 수필평론 공모 당선.
저서: 수필집 ≪떠내려간 고향≫,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감각의 제국, 그 벽속에서≫, ≪뭐하는 짓이고?≫, 수필평론집 ≪수필, 누구를 쓸것인가≫,
≪수필쓰기 방법론, 넷≫, 수필교재: ≪수필, 어떻게 쓸까≫, 미술사 ≪한국 근·현대 서예사≫,
≪조선 후기 회화사(19세기)≫, 기타 ≪우리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가(육아서)≫,
≪우리 고을 지킴이, 팔공산(토속신앙)≫, ≪문학치료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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