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경자님의 추억을..... 여러분들의 추억도 나누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추억을 말이 아닌 글로 나눈다면 얼마나 풍성할까요.
날것의 삶이 머물다
기분이 가라앉은 어떤 날, 거기에 서 있으면 쓸쓸함이 아래로 더 내려
가 스스로 끝장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소음과 살짝 구분되어
사라지는 외로운 울림을 들으며 그 길을 걷는다.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밀리고 부딪히다 문득 먹고 자는 기본 욕구도 내팽개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한일극장 옆의 와플집 앞에 몰려있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
어 한 조각을 사들고 몇 걸음 옮겨 커피 파는 곳에서 또 멈춘다. 동성로
의 이런 집들 앞엔 긴 줄이 없다.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릴
뿐이다. 초조하게 입을 다물고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저 틈에서 어떻
게 해야 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슬그머니 그 속에 들어가 섞이다
보면 어느 결에 먹을 것을 받아들게 된다. 동성로에 나가면 행복해진다.
그 길엔 아무런 정서가 없다. 어깨를 비끼며 오가는 젊은이들로 북적
대기만 한다. 거리가 사람을 품고 그들의 소리가 길 위로 떠돌면 도로가
받아 안을 뿐이다. 거리의 힘에 이끌려 그대로 두 다리를 거기에 맡기면
마음도 따라간다. 동성로의 인력引力은 운신은 물론 그곳의 풍경마저도
자유로이 포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저 스쳐 지나가라고 한다. 몇
번이고 같은 길을 오가게 만들고 난 후에야 어느 곳인가로 들어가 볼일
을 보든지 마음대로 하란다.
원래 심심한 걸 잘 견디기에 꼭 그곳에서 떠들썩함을 즐기려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산 냄새나 물소리를 찾아나서는 일에 더 열심이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그 길로 들어서게 되면 세상살이가 신난다. 동성로
에선 나이를 잊게 된다.
세상사가 그렇듯 활기넘치는 그런 거리에도 복병이 있었다. 가는 비
가 오는 날 오후였다. 크리스피크림도넛을 사들고 지하도를 나와 동성
로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돌연 가슴이 메어왔다. 갑자기 오가는 여자
들이 딸아이로 보였다. 희고 둥근 얼굴을 한 수많은 딸애가 거리 곳곳에
있었다. 그랬다. 거기는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애가 미국으로 가
기 전까지 그곳은 우리들의 거리였다. 딸이 학교에서 나올 시간이면 부
리나케 출발해 만나던 장소였다. 같이 영화를 보고 나와 주인공이 입었
던 청바지나 단화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턱없이 비싼 값을 부
르면 아무래도 그 여배우 것보다 못하다는 타박으로 포기했다. 교보문
고에서 책장을 뒤적이다 지하로 내려와 좋아하는 음악 CD를 사고 길거
리의 군것질을 즐겼다.
어쩌면 딸의 부재를 의식 한편에서 애써 모른척했던 것 같다. 한데
어쩌자고 길 한 모퉁이에 묵연히 서 있게 만드는 건가. 늘여뜨린 손을
내려다보다 도넛에서 희미한 답을 얻는다. 딸애가 있는 도시 랄리가 크
리스피크림도넛을 처음 만들어낸 곳이라 미국에서 함께 갓구워낸 것을
사러가기도 했었다. 도넛의 질감은 한없이 부드러운데 그리움은 현실
앞에 무력하다. 무엇을 하러 나갔었는지도 잊은 채 그냥 비 오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고 말았다.
어떤 길을 걸을 때 그곳이 관광지거나 혹은 뒷골목이라도 거기엔 자
신에게만 보이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추억이란
흙이 있는 자리에서만 자라는 풀이거나 꽃이라고 여겨왔다. 흔히 서울
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하는 말도 그랬다. 아스팔트와 고층건물뿐이라서
고향에 대한 회상이 어렵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특별한 장소
에만 생기는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동성로에선 흙 위에 시멘트가 두껍게 덮이고 흐르는 물이나 단풍나무
가 없어도 추억은 잘 피어나는 풀꽃이 된다. 사는 일이 부실한 바람벽
같아서 발목이 시릴 땐 거기에 가서 풍요를 느낀다. 그 거리엔 빛이 가득
하다. 하늘이 어두워도 사람들이 발산하는 빛으로 들끓는다. 기진맥진
한 삶도 인파의 열기에 휩싸이면 기운을 되찾게 된다. 유행하는 옷차림
으로 길을 걷는 이들을 보며 잠시 나를 잊는다. 그들이 들어간 곳을 기웃
거리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 안쪽에서부터 따뜻해져온다. 그
온기가 십여 년 전에는 현재의 내 모습이 되어있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했으면서 아직도 내가 자신의 삶을 주관할 수 있으리란 망상을 갖게
한다. 순간 자신이 달라질 수 있는 시기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길을 가다 멈춰서서 짧은 동안이나마 또 다른 곳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동성로엔 사람들만 다니는 게 아니라 봄바람도 함께한다. 차고 낯선
곳에서 발아하기 좋아하는 이 바람은 해마다 신품종임이 분명하다. 늘
새롭고 달콤하다. 봄이 바람을 닮아 멋대로이듯 동성로도 자유분방하
다. 그길로 들어서면 먼 곳에서 훠이훠이 달려온 사람같이 심장이 두방
망이질하고 설렌다. 그곳이 구태여 어른스러움을 고집하지 않는 속셈을
알 것같다. 긴 삶을 바라봐야 하는 체온이 높은 거리이기에 그렇다.
허서경자 --------------------------------------------------------------------
2001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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