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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4월호,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작품론] 수필에서 형상과 교술 - 신재기

신아미디어 2012. 5. 3. 14:52

2012년 3월호 수필과 비평에 수록된 2편의 글(윤정혁의 <남향집>, 이정림의 <큰바람은 비껴가고>)에 대한 신재기님의 작품론입니다. 왜 수필에 비평이 더해지면 글을 읽고 쓰고 싶어지는 것일까요. 여러분들도 그러하시겠죠..

 

 

수필에서 형상과 교술


   필자는 적잖은 기간 동안 ‘이달의 문제작’에 수필 비평문을 써왔다.
그것은 앞의 호에 발표된 작품 중 소위 ‘문제’ 작품을 선정하여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이었다. 대상 작품은 꼭 ≪수필과비평≫에 수록된 작품이
아니어도 괜찮다. 같은 값이면 본지에 수록된 작품을 우선하는 것은 평
문을 쓰는 사람의 기본 예의일 뿐이다. 가끔 다른 지면에 수록된 작품도
그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주로 선정했던가? 과연 어떤 작품이 ‘문제적’인가?
필자가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자의식이 강하게 발동되었다. 솔직
하게 말해서 작품 선정이 쉽지 않았다. 그냥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가장
좋은 작품을 선정하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
가 있으면서 동시에 ‘문제성’을 지닌 작품을 고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런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원고 마감
일까지 미루적거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필자가 설정한 주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작품을 골라 집필에 들어간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이야기
를 풀어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작품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
다. 필자의 주제 설정과 비평 대상 작품 중 일률적으로 꼭 어느 것이
먼저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 상황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늘 ‘문
제’ 작품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 필
자가 주제를 풀어내기에 가장 편한 작품이 주된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평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글을 쓰는 필자보다는 작품 쪽을 우선하여 문제
를 풀어갈까 한다.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는 상식적인 기준에서 작품을
선정하여 주목해 보기로 한다.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두 작품을 골
라 왜 좋은 작품인지를 분석해 본다. 물론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의 주관
성은 어쩔 수 없다. 비평가의 작업은 주관에서 출발하여, 그 주관성이
보편성을 얻도록 논리를 펼쳐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윤정혁의 <남향집>
   윤정혁의 <남향집>을 먼저 읽어본다. 작가의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수필가 윤정혁은 몇 번의 전시회를 했던 화가다. 주로 풍경화
에 몰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풍경을 화폭에 담을 때도 전체의 구도가
매우 중요하리라. 미술 창작으로 다져진 미의식 때문인지 그의 수필은
구성이 개성적이다. 작품에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고심한 흔적이 역
력하다. 군더더기 같은 곁가지가 없다. 이야기 전개에 집중력이 있어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작품 <남향집>은 거주하는 집을 옮겨 다녔던 이야기다. 단독 주택에
서 아파트 삼 층으로, 다시 고층 아파트 19층으로 이사한 과정을 이야기
한다. 단독 가옥에 살 때는 앞의 삼층집에 가려 햇볕 한 자락 구경하지
못해서 마치 수형자처럼 갇혀 사는 것 같았다. 글 한 줄 읽으려면 전등을
켜야 했다. 아내의 우울증이 시작된 것도 이 집에 살면서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사한
집은 동향의 3층 아파트다. 그 집은 “음습하고 꽉 막힌” 전 집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전망이 툭 터져 오전 내 볕이 들었다. 아파트로 이사한 후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문득 햇볕은 사람의 영혼까지도 따뜻하게 적
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정이 밝아진 아내가 부지런히 화초들을
사다 나를 때, 나는 소파에서 번듯이 누워 책을 얼굴에 덮은 채 오수를
즐기기도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삼십 층이 넘는 고층아파트들이 집
맞은편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툭 터졌던 시야를 가렸고, 아침나절의
햇볕까지 잡아먹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남향 아파트 19층으로 옮겼다.
이사하고 나니 하루 내내 집안 깊숙이 햇볕이 들이붓는 듯했고, 화초까
지도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일이 우스꽝스럽게 꼬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한 아파트 맞은편에 사십오 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볕 잘 드는 집을 찾아 이사했는데 가는 곳마다
더 높은 집이 생겨 일이 꼬여간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짜 맞춘 듯이
아귀가 잘 맞다. 화제의 재미도 넘친다. 독자는 ‘세상에 그런 희한한 일
도 있구나.’라고 하며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가 작가가 마지막에 가서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주목하게 된다. 비슷한 일이 반
복하는 이러한 화제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적절하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결말을 매우 궁금해하도록 한다.
   이 작품의 형식적 참신함은 이야기의 이러한 구조적 성격보다는 화자
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작품은 “이 선생, 내가 언제 아파트 삼 층에
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그리로 이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또 이사
를 했습니다.”로 시작하여 “이 선생 집들이 같은 걸 할 형편은 아니고요,
언제 시간 나면 놀러 한번 오시지요. 소주나 한잔 하십시다.”로 끝난다.
‘이 선생’이라는 구체적 청자를 설정하고 있다. 액자소설의 구조처럼 작
품 처음과 끝에 ‘이 선생’이라는 청자를 내세운다. 물론 이는 처음 시도
하는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체적 청자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
작품의 이야기 자체와 잘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시간 나면 놀러 한번 오시지요.”라는 마지막 구절로
봐서 ‘이 선생’이라는 청자는 화자와 같은 공간이 있지 않은 것으로 짐작
된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화법은 편지나 전화 통화일
것이다.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편지의 전통적인 흔적이 없는 것은 편지
로 보기 어렵게 하고, 청자가 중간에 전혀 끼어들지 않는다는 점은 전화
통화라고 단정할 수 없게 한다.
   ‘이 선생’이 누구인지, 어떤 화법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기막히고 놀라운 경험을 아주 가
까운 사람에 털어놓는다. 그것이 정말로 희한한 일이기에 마음속에 그
냥 담아둘 수 없다. 누구한테 말하고 싶어 한다. 숲 속에 가서 혼자서라
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지니는
본성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
을 두고 시시콜콜 ‘수다’를 떤다. ‘수다’를 ‘쓸데없는 말수’라는 사전적 의
미로만 보지 말고, 다른 측면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말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리는 인간의 사소
한 일상은 수다에 의해 재생된다. 수다는 ‘헛말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
지만, 일상의 의미를 건져 올리는 작업이며 개인의 삶을 보편적인 것으
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심각한 문제, 개인의 생명
이 걸린 중대한 문제, 이익과 손실을 초래하는 경제적인 문제 등과 같이
거시적인 것들은 ‘일상의 수다’라는 벡터에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
런데 이사하는 곳마다 앞에 높은 집이 들어서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
는 치명적인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억울하고 재수
없는 일이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수다의 품목으
로 적격일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의 일상을 담아내는 수필은 어쩌면
‘점잖은 수다의 양식’인지 모른다. <남향집>은 한 개인의 기막힌 이야기
를 가까이 있는 친구에게 고백하는 혹은 수다를 떠는 것같이 말한다.
이에 가장 적합한 화법은 무엇일까? 화자가 구체적인 청자에게 이야기
를 들려주는 방식이 최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윤정혁의 <남향집>은 독자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의 결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향집을 얻으려면 삼대의 적선
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 기대어 “내가 남향집을 갖게 된 것은 조상의
덕이라면, 이제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일은 아마도 내 적선의 부재 탓
이겠지요. 땅 위에 방 한 칸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음을 잊은 과욕에 대한
경고일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어느 정도 주제 의식을 찾을
수도 있으나, 별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적선하는 착한 일, 과거를
잊어버리고 과욕을 부린 자신에 대한 반성 등으로 이 작품의 주제를 몰
고 가는 것은 일차원적인 단순한 독해다. 작가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그것에 어떤 의미를 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보여
줄 뿐이다. 무엇이라고 단정해 말하지 않고 물러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개인에게는 기막히고 심각한 문제를 남의
이야기 하듯이 수다로 풀어내는 방식, 그 자체가 인생이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고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이정림의 <큰바람은 비껴가고>
   이정림의 <큰바람은 비껴가고>를 읽어 보자. 수필의 정답을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의 오랜 경륜과 내공이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왜 이 작품이 수필의 모범으로 읽을 수 있는가? 그 까닭은 우선 선명한
주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간밤에 초특급 태풍이 지나갔다. 무서울 정도로 강풍을 동반한 태풍
이었다. 바람의 속도가 초속 58미터라고 하니 그 위력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아침 출근 때 가로수가 뿌리째 뽑힌 채 쓰러져 있었다.
제주도 어느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터에 누군
가가 세워둔 깻단은 그 강한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전신주
가 뽑히고 자동차가 뒤집어지는데 가느다란 깻단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것을 보고 화자는 온종일 의아해했다. 저녁에 전화로 “작은
것들은 큰바람이 비껴가는 법”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뿌리째 뽑힌 나무는 있었지만, 뿌리째
뽑힌 풀은 없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화자는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작고 큰 풍파를 자
기 스스로 용케도 잘 이겨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고
말한다. “나라는 사람은 본래 큰 존재가 못되니 내 인생에 불어 닥친
바람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
에 불어왔던 숱한 바람에도 내 존재의 크기만큼 느껴졌을 것이고, 그
바람에 견디기 어려웠던 것도 작은 사람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작가는 이렇게 끝맺는다.


   오늘 아침, 간밤의 그 무서운 바람에도 끄떡없는 풀들을 보며 작은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과 평화를 생각한다. 작은 것들의 작은 행복
이 새삼스레 소중해 보였던 오늘, 나는 비로소 내가 작은 존재임을 기쁘
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은 것들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한다. 작으므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소중하기에 내가 작은 존재임을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발견과 긍정으로 주제가 결집한다. 이 작품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실제 현실을 통해 ‘작은 것들은 작기 때문에 자기만
의 행복과 존재감을 가진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수필은 주제의 문학이다. 메시지가 부실한 수필은 작가의 푸념이나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주제가 뚜렷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문학은 주제를 곧바로 진술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화를 통해 암시한다. 주제를 말하는 것보다는 구
체적인 형상화를 통해 함축하는 것이 문학 본래의 방법이다. 수필도 문
학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제를 설명하거나 주장하기보다는 형상화할 필
요가 있다. 그러나 수필은 허구적인 문학과는 달리 때에 따라서는 대상
이나 사건을 형상하기보다는 해석을 통해 의미를 구축한다. 이런 점에
서 수필을 ‘교술’ 혹은 ‘주제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 삶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인간 삶의
현실을 하나의 텍스트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 창작
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곳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석이고 비평이다. 따라서 문학의 텍스트는 사실 메타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말하는 삶은 작가가 해석하고 구성한
결과물이다. 실제 현실이라는 일차적 언어에 대한 이차적 언어가 문학
인 셈이다. 문학의 언어는 무의미한 상태로 무질서하게 혼재하는 실제
삶의 현실을 작가의 상징화 능력과 구성 능력으로 의미와 질서를 부여
한다. 언어에 의해 무의미한 현실은 유의미하고 분절된 현실로 구성되
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현실에 숨어 있는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기보다는 실제 현실이라는 일차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수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문학에서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수필의 방식은 교술의 성격이 강하다.
작가가 텍스트의 의미를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수필은 화자가 직접 나서서 독자에게 의미를 말해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반문학적인 방법이 바로 수필의 속성이다.
   작품 <큰바람은 비껴가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
가 경험한 일을 제시하는 전반부,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그 경험에 의미
를 부여하는 후반부가 그것이다. 작가는 태풍이 지나간 뒤 드러난 피해
상황을 먼저 제시한다. 그중에서 큰 나무들은 뿌리째 뽑혔는데도 아무
렇지 않게 그대로 서 있는 깻단에 주목한다. 이 같은 실제의 현실에서
작은 것은 큰바람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록
작지만 작은 존재만이 가지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작품은 ‘현실 경험’→ ‘자기 성찰’→ ‘의미부
여’로 전개된다. 이것은 일상의 작은 경험들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
견하고 자기 성찰에 이르는 수필 창작 과정의 전형적인 모형이다. 대체
로 결미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부여는 작가의 삶에 대한 해석이고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부분은 대체
로 작가의 해석적인 진술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필을 교술의 문학이라
고 하는 것이다.
   수필에서 작가에 의해 선택되는 제재나 화제는 하나의 해석 대상이
다. 해석 대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는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비유의 구조다. 작품
에서 이야기되는 화제가 보조관념이라고 한다면, 작가에 의해 해석되는
의미는 원관념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반부가 보조관념이고
후반부가 원관념인 셈이다. 이 비유의 구조가 알레고리가 되면 훨씬 교
훈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이처럼 행위와 개념, 사건과 이차적 의미의
상호 연관성을 따라가는 글쓰기가 수필이다. 그래서 수필은 화제에 의
미부여이고, 삶의 원리와 지혜를 말하기 위해 일상의 조각을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비유의 방식은 사유를 확장한다
는 점에서는 창조적이지만, 부분적인 것만 부각함으로써 다른 많은 부
분을 은폐할 가능성이 크다. 비유로 구조화된 개념은 선명하나 부분적
인 진실에 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작품 <큰바람은 비껴가고>의 창작방법은 비유적 구조에서 기반을 두
고 있다. 화제의 제시, 의미 해석, 삶의 성찰 등으로 이어지는 수필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 준다. 이는 수필이 주제의 문학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형상’과 ‘교술’
   주체가 말하는 대상의 공간적인 위상에 따라, 수필 쓰기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필가가 자기 자신의 ‘밖의 것’을 이야기하
는 것이 그 하나이고, 자기 ‘안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주체의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눈
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있었던 일을 이야기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객체가 중심에 놓이고 주체는 객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대상이
전면에 드러나고 주체는 뒤로 물러난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판단이 자
연스레 유보될 것이다. 이 ‘유보되는’ 부분은 독자의 몫이다. 따라서 전
체적으로 객관성이 강하다. 후자는 자기 내부의 것을 말하는 방식이다.
주체 내면의 의식세계가 중심에 놓인다. 수필가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
낌이 전면에 부각한다. 작품의 전체 분위기는 주관적이고 개성적일 가
능성이 크다. 기록과 보고의 성격이 강한 수필은 전자에, 자기고백성이
강한 수필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좋다는 평가는 불가하
지만, 일반적으로 후자가 수필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
은 것 같다. 이는 ‘서정’을 수필의 진수라고 보는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
다. 오랫동안 쟁점이 되어왔듯이 인식론에서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분
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무관하게 객체를 독립시켜 말할 수
없고, 객체와 분리된 순수한 주체의 내면의식을 드러낼 수 없다. 외부세
계의 부각이 자아 소멸이 아니듯이, 자아 내면의 드러냄도 대상의 제거
가 아니다. 외부세계에 무게를 싣는 것 그 자체도 어떤 의도이고, 자아의
생각과 느낌도 외부세계에 의해 촉발된 결과이다. 외부 혹은 타자와 무
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단독으로 생성하는 생각과 느낌은 없다. 수필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온전히 대상만을 말하는 작품이 불가하듯이,
전적으로 주체 개인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하다. 객관과 주관의 극점에
놓이는 작품은 없다는 말이다. 많은 작품에는 두 가지 성격이 혼재한다.
다만 몇몇 작품이 가정된 두 극점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더 쏠리어 두드
러질 뿐이다. 둘은 겉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이지만, 문학적인 성취라는
점에서는 방향이 같다. 문학이라는 같은 방향을 가면서 그 가는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굳이 개념화하면 모든 문학 장르에서 통용되는 ‘보여주기’와 ‘말하기’
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구체적인 형상화를 통해 사상과 정서를
표현한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문학의 기본은 ‘보여주기’이다. 무엇
을 말하지 않기가 문학의 본질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언어로 언어를
버리는 작업이다. 종국에는 언어의 물질성만 남는 상태, 온통 기표의
웅성거림만이 있고 의미는 소거된 경지다. 즉, 문학은 기표의 제국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도 높은 문학의 관점을 수필에서 그대로 적용
하면 수필의 중핵은 사라지고 만다. 수필은 상당 부분 ‘보여주기’와 대립
하는 ‘말하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술성’은 수필의 중
요한 장르적 특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수필의 문학적 본질은 반문학
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모순을 피해 갈 수 없다. 이 점이 수필의 장르적
묘미다. 그러므로 수필의 문학 본래의 순수함을 산 정상에 꽂아 놓고
그것을 향해 애써 산을 오르려는 노력은 사실 헛된 것이다. 수필의 깃발
은 문학의 정상에 꽂혀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산 언저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수필은 기표의 문학이 아니라, 기의의 문학이
다. 즉, 주제와 메시지의 문학이라는 점이다. 주제와 메시지는 보여주기
보다 말하기에 의해 더 잘 드러난다.
   수필은 문학의 자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그 문학의 테두리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고심하는 독특한 글쓰기 방
식이다. 창작방법에서 형상화라는 문학 본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채,
형상화와는 다른 길인 ‘교술’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앞에
서 읽은 윤정혁의 <남향집>이 형상화에 주력했다면, 이정림의 <큰바람
은 비껴가고>는 교술로서 수필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었다고 하
겠다.

 

 

신재기  --------------------------------------------------------------------------------
경북 의성 출생.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대구문학상, 신곡문학상 수상.
현재 경일대학교 교수.
평론집 ≪비평의 자의식≫, ≪여백과 겸손≫, ≪수필과 사이버리즘≫, ≪수필과 시의 언어≫
가 있고, 산문집으로 ≪언어의 무늬와 빛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계획한
다, 분서를≫, ≪경산신아리랑≫, ≪프라이버시의 종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