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모텔관음증〉 외 작품은 앞서 전제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사실 관음증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도사린 훔쳐보기 욕구다. 그 관음증은 모텔이란 공간과 결합될 때, 자칫 상투적 에로티즘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이 시는 거기서 벗어나 관음증의 껍질이 아니라, 그 내부를 조망한 역량이 돋보인다. 관음증의 확장력은 ‘비’ ‘TV’ ‘가로등’이란 오브제에게 투사되어 ‘낡은 TV’와 방영이 끝난 애국가와 ‘두 노인네’로 삼투되고 있다. 훔쳐보기의 주체가 ‘비’ ‘TV’ ‘가로등’이었다는 반전이야말로 새로운 관음증이며, 독자들의 감수성을 쇄신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특징은 여타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 이미지 진동의 울림을 확장한 점, 퍼스나의 다채로운 변용이 능란하다는 자질과 함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부디 정진하여, 선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주기 바란다."
모텔관음증 외 4편 / 김수진
건물 뒤로 몰래 숨어버렸어 밤새 내리던 비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풍경이나 나근나근 씹어대던 창문이 열리면 그곳엔 오래 살았다 오래 살았다 되뇌이던 한 송이 곱게 핀 무궁화를 부둥켜안은 TV가 있지
어쩐지 어젯밤 잠이 오질 않더라니
붉은 눈 흘린 채 은은히 드러누운 등불 아래서 뭣들 하는 건지
조정화면 지나 화면 가득 무궁화를 피운 언덕에서 두 손 마주잡고 행복에 겨운 슬픔을 꽃피우던 두 노인네가 미친 듯 소리 없이 울부짖도록 뭣들 하는 건지 그 소리 잊혀 지질 않아 한 숨도 자질 못 했어 행복한 슬픔의 울음소리가 들려 와 봄날 진달래가 여기저기서 붉은 울음을 토해내던 날들처럼 온 벽면에 수를 놓지
가로등이 고갤 들어
하늘에 숨을 붙이면 잘 수 있으려나
그렇게 가로등에
불빛을 지우고 나서야 잠들어버릴
저 못된 것들
사과나무에게
왜.하.필
그곳에서 툭.하고 떨어지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알 먹었습니다
분명 잊혀 지던 바람에 실려와
철푸덕 철푸덕 지는 아픔 토해내던 가을의 한 구석에서
그 아픔 덮고서 가으내 겨우내 깊숙하게
마른 발자국 되신 거겠죠
바람 울고 잎잎이 순순히 돋아나던 계절
빗발치는 햇빛마저 버거워 벗어놓은 잎새
다시 일어설 준비 하셨겠죠
몰랐습니다 그대 작은 상처 안고 계셨음을
한 순간 피어나진 않았겠지만
문 득 문 득 걸어오지도 않으셨겠죠
속살에선 날선 핏줄 오르고 울렁이는 고개 떨구도록
그대 참 많이도 아프셨겠죠
달을 토해내며 솟는 노을처럼 붉은 과즙 피워내며
들녘에 한 그루의 파장이 되셨던 거겠죠
나,
그대 상처 한 입 베어 물던 날
비로소 두 팔 벌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셨던 거겠죠
그대의 삶,
참으로 축복받을 일입니다
그대,
타는 목마름에 아삭아삭 참으로 맛있었습니다
내년에도 그 다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연처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달빛 무늬가 쏟아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대는 기이픈 밤을 숨 쉬는 나무입니다 거대한 숲 속에 웅크린 채 낮과 밤이 맞물리는 새벽만을 애타고 애타게 울부짖던 지나간 시간의 태엽입니다 분과 초가 맞물려 그토록 거대한 숲을 토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저 꺾이지 못할 나무를 기어오르는 것처럼 찬연하게 빛났었던 달빛들의 무늬이자 서로의 손을 맞대고 읽혀졌던 추억입니다
담쟁이는 늘 중얼거리곤 했었다지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고 그럼에도 당신의 깊고도 좁았던 책상 위는 오르지 못했었다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르지 못한 곳을 상상할 수만은 없었기에 당신의 무늬는 빛바랜 책의 물결과 같았을 거라고 말을 하곤 했었다지요 짙은 노을로 지는 태양을 삼켜 상기된 채 묵묵히 입 닫은 아버지의 책과 같았을 거라고
나무는 그렇게 곱고 곱게 접혀 책이 되었다지요 잉크로 가득 채워 진 방안에 들어가 온 몸에 글로 된 무늬를 입고 나오니 이 세상은 온통 박수소리뿐이었다지요 온갖 아름다움으로 꽃도 피우고 나무를 세워 숲을 만들었다지요 달빛이 쏟아지는 밤을 지새우며 책은 그렇게 읽혀졌다지요
잊혀진 책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의 책장엔 버려졌던 옛 추억을 머금은 책들이 먼지를 머금고 있습니다 책은 숯보다 강합니다 책의 정화력은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자신있습니다 무늬가 울렁이는 밤이 다가서면 책은 술렁입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형광등의 달빛이 거실을 비추면 아버지의 숨이 닿았던 책들이 말을 걸어오곤 합니다
하지만 가로의 무늬로 읽혀지는 책들은 언제나 고요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책장에서 꺼낸 책들은 이내 잠이 들지요 그리고 나도 곧 잠이 듭니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그제서야 달빛들이 쏟아집니다 달의 무늬가 새겨진 달빛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대에게
지금의 오늘은
그대가 숨 쉬고 있는
새벽입니다
사랑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지금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나요
모텔과 모텔 사이로 하루 종일 서 있는 가로등이 보이는 이곳에선
비가 내리는 지 가는 지 오는 지 뛰고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낙엽들은 지쳐 쓰러지며 울고들 있다는 데
지금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나요
어제 밤에 빨아 넣었던 줄무늬 사각팬티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가슴 아프게 말라 죽어가는 가느다란 저 식물의 줄기들은
온종일 비를 기다리던데
그 좁은 땅은 그새 메말라 부슬부슬 모래가 씹힌다고 하던데
줄기들은 힘이 하나도 없이 잊혀 진 책장처럼
그 어느 곳에서 조차 잉크 냄샌 나질 않는다던데
책들이 그렇게 많았다면서요
너와 나의 이름이 적혀 있던 전화번호부며
그리고 당신의 졸업앨범이며
당신이 매년 들고 다녔던 그 새빨간 다이어리
음악 같은 눈이 내리는 격렬비열도의 풍경을 담았던 시집이며
그 많고 많았던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가요
봄도 여름도 겨울도 낭만으로 가득 차
온통 사랑으로 물들었던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리던데
지금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나요
지금 그대 가슴에 비가 내리고 있나요
가끔은 정말 보고싶어요
그대 가슴에 깊숙하게 박히고 있을
그 찬연했던 빗소리를
가끔은 정말
* 류근의 시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에서
스물아홉
아싸, 돈이다!
이젠 길 위의 반짝이는 모든 것들이
동전으로 보이는 토요일
어째 하늘엔 구름도 한 점 없다
고픈 배 쓸어안고 가는 발 위에 선
나무줄기를 잡아 뜯어 껍질을 살-살- 벗겨 라이터로 구워본다
고슬고슬 참 달짝지근한 냄새 아, 아카시아 나무다
환장하며 날뛰는 잇몸의 신경들,
향긋한 이 맛 이번엔 진짜 제대로 익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요일을 생각하며
지난 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마트를 스친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사랑
오늘만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 내가 사랑할 사람은
지고지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내 어머니시다
그분은 신과 같은 존재여서 양손 가득
일용할 용돈을 들고 계신다
이번 주일에도 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양팔 가득 기도를 드려야 한다
오, 할렐루야 어머니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제발 만원만 더 베푸옵소서
당신의 인내와 지폐를 베푸시어
부디 이 불쌍한 중생을 굽어 살피소서
아멘.
하릴없는 시간을 곱씹으며 일용할 양식을 위해
미안하지 않은 길 위를 전혀 미안하지 않은 걸음으로 걷고 있는
오늘
김수진 -----------------------------------------
1981년 생, 2008년 대전대 문예창작과 졸업, 현재 대안학교 제천간디학교 생활교사.
당선소감
어떤 멋진 말로 소감을 적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더 고민이 되어버렸습니다. 늘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끄적이던 글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던 게 습관이 되어버렸었는데, 한순간의 생각만으로 글 한 편을 적어야 한다는 부담감. 그야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인 듯 싶습니다.
우선 어머니와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철없었을 대학시절 그리고 그 이후까지 시와 여행을 좋아하는 이 막내아들을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신 어머니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어머니가 어느 날 저에게 해주셨던 ‘아빠도 너 같이 시와 여행을 좋아하셨다.’던 그 말씀.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어서 시를 가끔 놓고 살던 그때에도 끝까지 이해해 주시고 응원해주셨던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저에게 있어 큰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철없는 동생의 우상이자 큰 버팀목이 되어 준 우리 형과 형수님, 우리 귀엽고 예쁜 조카 서하랑 서은이. 이제부터 잘할께요.
그리고 친구들. 대학 친구인 김관식, 문정환 형과 군대 친구 박찬종. 그리고 국방인트라넷 시인부락동인회 친구들, 주니어플라톤에서 함께한 선생님들. 함께한 삶, 그 시간 속에서 튼튼한 나무의 그늘처럼 늘 저와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저에게 큰 힘이었습니다.
더불어 제천간디학교 선생님들과 우리 아이들. 다시 시와 함께하기 시작한 그 무렵 그네들이 있었기에 다시 시를 읽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없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묵히고 묵히면서도 늘 미안해서 나 혼자서 읽고 고쳤던 나의 글들. 기다려 주어서 감사해. 우리 다시 같이 걷자.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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