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에서 신곡문학상 대상을 받으셨던 작가들의 신작에세이를 특집으로 꾸몄네요.
고수의 햇살과 숨결을 같이 느껴보시고,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처마
경주 양동한옥마을에 가서 기와집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마루는 손
님을 맞이하는 곳이요,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다.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끝으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여인의 허리
곡선처럼 뻗어나간 처마의 선은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만난다.
마루에 앉으니 안마루 위로 올라가고 싶다.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에 빠지
고 싶다. 마루의 감촉이 척추를 통해 서늘하게 전해오고 산山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 주리라. 백 년도 넘은 소나무로 만든 마루는 심신心身을 청량하
게 해주리라. 여름에 이보다 더 좋은 감촉과 기분을 맛보기란 어렵다.
처마는 집의 바깥 쪽 기둥을 연결한 선에서 지붕 끝까지의 서까래 아
래 공간을 말한다. 처마는 햇볕의 양을 조절해 주어서 여름을 시원하게
겨울은 따뜻하게 해준다. 처마는 집안과 사람들을 보살펴주는 보호망
같다. 한옥은 단순한 구조이긴 하나 온돌방, 마루, 처마라는 특수한 공간
을 연결해 실용적이면서도 미적인 조형성을 살려내고 있다.
한옥 처마의 서까래는 햇살 무늬 같고 빗살무늬처럼 보인다. 여름엔
햇살을 막아주고 겨울엔 끌어들여 온도 조절의 역할을 한다. 처마 끝으
로 구름을 만나고 계절의 운치와 정감을 느끼게 한다. 처마에서 떨어지
는 빗소리는 마음을 적셔주며 처마 끝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온다고 했다.
처마는 생명 공간이다. 새봄이 오면 강남 갔던 제비가 집을 찾아 날아
드는 곳이다. 제비가 처마 밑 둥지를 찾아 새끼를 낳게 되면, 집안은
생동감이 넘친다. 어미 제비가 물고 온 먹이를 서로 받아먹으려 새끼들
이 일제히 입을 벌리는 모습이 귀엽고도 사랑스럽다. 처마는 제비의 보
금자리가 되고, 새끼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기와지붕의 곡선에서 돋보인다. 부드럽고 온화한
선은 지붕의 처마가 공중으로 흘러가는 듯하고 전체 지붕의 맛을 살린
다. 밋밋하게 직선으로 돼 있지 않고 바깥쪽으로 날개를 편 채 날아가는
듯하고 휘어진 수양버들처럼 나긋하고 늘씬하다. 처마의 선은 주변 사
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평화와 정겨운 미소를 보여준다.
처마의 선은 버선코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대궐이나 사찰 같은
곳에선 처마 끝에 단청을 올리고 연꽃문양을 수놓았다. 하늘에 연꽃 향
기를 띄워 보내고자 했다.
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를 뿌린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
리를 듣는다. 빗줄기가 내는 음향 속으로 땅과 세상이 자욱이 젖어들고
있다. 만물이 윤기를 내며, 싱그러운 신록의 향기가 퍼져 흐른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공교롭게도 비가 퍼붓기 시
작했다. 한길로 가기보단 골목길을 택하는 게 좋다. 골목길가의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가 멈추거나 느슨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가끔씩 피아
노 소리가 울리기도 했고, 넝쿨 장미가 향기를 뿜어주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머니와 딸이 나란히 우산을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 석이 아니니?”
한 반이었지만 낯을 가리던 숙향이었다.
“한 반 아이였구나. 비를 맞았구나. 이리 와 함께 가자.”
숙향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을 건넬 때, 나는 빗속으로 백 미터 경주를
할 때처럼 달려갔다. 비 맞은 꼴을 숙향에게 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처마를 보면 우두커니 마루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떠
오른다. 어른이 되고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구름과 별과 바람과 귀엣말
을 주고받지 못하였다. 새소리와 매미와 귀뚜라미 소리를 듣지 못하였
다. 까치와 인사말을 주고받지 못했다.
한옥의 처마는 자연과 만나는 문이 아닐까. 자신만의 삶만 알고 자연
속의 일부인 것을 모른 채 지내는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곳이 아닐
까. 마음의 여유와 휴식과 지혜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닐까.
안과 바깥의 경계이면서 양쪽을 품어주는 한국인만의 여유와 배려의
오묘한 장치일 듯싶다. 처마를 통해서 영원과 만나게 하고, 인간과 자연
의 조화를 꾀하려 한 조형물이 아닐까.
처마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빗방울 떨어지
는 소리, 구름의 손짓과 산들바람의 촉감, 비에 젖은 풀꽃 향내, 번개와
뇌성…….
처마의 선線은 반듯한 직선이 아니다. 휘어지며 치솟아 오르는 곡선미
는 주변의 산 능선과 강물의 유선流線을 닮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양동마을, 비어있는 한 고가古家의 마루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들어
처마 끝으로 푸른 하늘과 청산靑山에 눈을 맞춰본다.
정목일 --------------------------------------------------------------
1945년 경남 진주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수필 천료.
경남문인협회장. 경남문학관장 역임. 한국문협 부이사장 (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현).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수필교실 지도 교수(현).
수필집: ≪남강부근의 겨울나무≫, ≪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 ≪모래알 이야기≫, ≪달빛고요≫, ≪별 보며 쓰는
편지≫, ≪깨어있는 者만이 숲을 볼 수 있다≫, ≪나의 해외 문화기행≫, ≪심금心琴≫, ≪가을 금관≫, ≪목
향≫, ≪침향沈香≫, ≪모래밭에 쓴 수필≫, ≪햇살 한 줌 향기 한 줌≫ 외 다수.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수필문학대상, 현대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제1회 GS에세이문학상 본상, 한국문학상,
제2회 조경희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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