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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3월호, 신작에세이 특집] 큰바람은 비껴가고 - 이정림

신아미디어 2012. 3. 25. 20:34

수필과 비평에서 신곡문학상 대상을 받으셨던 작가들의 신작에세이를 특집으로 꾸몄네요.

고수의 햇살과 숨결을 같이 느껴보시고,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바람은 비껴가고


   간밤에는 무서울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무엇이
계속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았더니,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
에 커튼 줄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또 밖에서 부는 바람은 유령처
럼 울부짖으며 유리창에 와 부딪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음울하게 들
리는지 밤기운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얼마나 바람이 불
면 이러나 싶어 문을 조금 열어 보려고 하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급히 문을 닫았다.
바람의 기세가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신문을 보니 간밤의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라 초속 58미터
로 불어 댄 ‘프라피룬’이라는 태풍이었다. 기상청의 풍력 계급표에 따르
면 초속 21~25미터(큰센바람)이면 기와가 벗겨지고, 초속 25~29미터(노
대바람)이면 가옥이 뿌리째 뽑힌다고 한다. 그리고 초속 30미터(싹쓸바
람)가 넘으면 차량이 전복된다고 하는데, 초속 58미터로 불어 댄 간밤의
바람이 얼마나 초특급 태풍이었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는 가로수들이 몇 개 뿌리
째 뽑혀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주도에서는 한 마을이 전쟁터
처럼 폐허가 되었다는데 아직 뿌리를 튼실하게 내리지 못한 나무가 그
무서운 바람을 어찌 이겨 낼 수 있었겠는가.
   땅에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다
가 무심코 공터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한 낯선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
었다. 낯선 모습이라곤 했지만 그것은 누가 그 공터에서 수확한 깨를
다발로 묶어 세워 놓은 것이었다. 병사들이 쉴 때 총을 세워 놓는 것처럼
농부가 가지런히 세워 놓은 깻단, 그것은 결코 낯선 모습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모습이 왜 내 눈길을 끌었을까. 가을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모습이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 아침은 여느 가을 아침이 아니었다. 아랫녘에서는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전신주가 뽑히고, 자동차가 뒤집혀 부서졌다는
뉴스가 신문에 대문짝처럼 난, 아주 심란한 아침인 것이다. 그런 아침에
줄기가 가느다란 깻단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서 있는 모습
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마음이 깻단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녁에 언니로부터 간밤에 별 피해가 없었느냐는 전화가 왔다. 아파
트에 사는 사람들이야 무슨 피해가 있겠느냐는 말을 하다가 아침에 본
깻단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심드렁한 소리로 작은 것들은 큰바람이 비
껴가는 법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언니의 그 말을 듣자 장마 끝에
볕이 반짝 드는 것처럼 하루 종일 헤어나지 못했던 사유의 골짜기에서
갑자기 벗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한마디 말이 내게는
매우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길거리에는 뿌리째 뽑
힌 나무들은 있었어도 뿌리째 뽑힌 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연약한
것들은 큰 것들의 맞수가 되지 못해 무사한 것일까. 아니면 큰 것들은
연약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도 나를 스쳐 간 바람들이 많았다.
어느 때는 그 바람으로 내 영혼이 황폐해 버릴 것 같은 나약한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그 바람으로 내 존재조차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참담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바람들을 용케도 잘 이겨냈
다. 아니,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아침, 그 깻단을 보기 전까
지는.
   그동안 나는 내가 현명해서 그 ‘바람’들을 이겨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본래 큰 존재가 못되니 내 인생에
불어 닥친 바람 역시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내 체감 온도에만 견딜 수 없는 바람이었다 해도 내가 그것
을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은 작은 사람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큰 사람의 한계와 작은 사람의 한계, 그것에도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인생의 바람받이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맞닥뜨려야 했던
바람들은 누구에게나 춥고 매섭지 않았을까.
   오늘 아침, 간밤의 그 무서운 바람에도 끄떡없는 풀들을 보며 작은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과 평화를 생각했다. 작은 것들의 작은 행복
이 새삼스레 소중해 보였던 오늘, 나는 비로소 내가 작은 존재임을 기쁘
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정림(李正林) -----------------------------------------------------

1974년 ≪수필문예≫ 등단.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강사(2002∼2003).
(현재) 계간 ≪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수필 강사.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 ≪산길이 보이는 창≫, ≪숨어 있는 나무≫.
수필선집: ≪하얀 진달래≫, ≪민들레 씨앗≫. 편저: ≪이분들이 계셨다≫. 4인수필집 ≪시간의 대장장이≫.
평론집: ≪한국수필평론≫, ≪한국수필평론 개정판≫.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