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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3월호, 신작에세이 특집] 느낌표 - 유병근

신아미디어 2012. 3. 26. 01:00

수필과 비평에서 신곡문학상 대상을 받으셨던 작가들의 신작에세이를 특집으로 꾸몄네요.

고수의 햇살과 숨결을 같이 느껴보시고,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느낌표

                                     1
   화분을 거실 안으로 들여놓을까 어쩌나 궁리하다가 그냥 둔다. 베란
다 끝으로 햇볕이 다가오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냥 돌아서고 만다.
소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집안에 들앉아 삼식三食이 신세나 다름없다니 따분한 노릇이다. 어디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올 생각마저 그냥 접어버린다. 날이 차기도 하지
만 마땅히 갈 곳도 없다. 기껏 간다는 곳이 강변 쪽으로 걸어보는 산책길
이 있을 뿐이다. 그 길에서 이따금 생각을 줍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다.
버린 생각의 부스러기는 추운 바람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밟혀 아무 소용도 없이 부서지고 말겠다는 생각
을 하면 뜬금없이 서운하기도 하다.
   어저껜 바람에 휩쓸려 소용돌이치는 먼지를 보았다. 강변산책길에서
였다. 그 먼지 속에 흐지부지 버린 생각의 부스러기도 덧없는 바람결에
휩쓸렸을 것이다. 바람은 대개 강물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얼듯 말듯
추위에 오그라드는 강물에 멍하니 눈을 팔고 있었다. 생각의 부스러기
들이 꽁꽁 얼어서 내내 풀리지 않겠다는 염려를 하는 것도 괜한 노릇이
지만 그랬다.
   고개를 드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하늘에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흩어지
고 있었다. 서로 얽히고설킨 구름을 하늘이 실타래 풀듯 풀어주는 것이
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봄기운을 차리자면 하늘이 먼저 포근해야 하지
않겠나.
   화분을 거실 안으로 들여놓으면 한 식구처럼 오순도순 정답게 잎을
뻗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어떤 식물은 집안의 공기청정기 노릇을 한다
는 그럴싸한 말도 있다. 잘못 끼적거린 내 문장도 화분이 받아서 말끔하
게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지 싶다. 문장의 지렛대 노릇을 하는 화분이라
며 잘 먹히지도 않는 말을 주절대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이유
가 없다. 서둘러 거실로 들여놓아야 마음이 놓이겠다. 얼굴 두꺼운 이기
주의자의 가벼운 행동거지라며 화분이 입을 삐쭉거린들 어쩌랴.
   다시 화분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을 때다. 귀여운 젖니 같은 파르
스름한 촉이 두엇 맑은 눈짓을 하며 빵긋 내다보고 있다. 새 촉은 진작부
터 옹알거리고 있었는데 그 옹알이를 눈치 채거나 듣지도 못했다. 귀로
들어야 할 것을 그냥 놓치는 둔하고 자상하지 못한 처지를 화분이 쯧쯧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으리라.
   낯간지러운 노릇이지만 화분 둘레를 물걸레로 조심스레 닦아준다.

 

 


                                       2
   목이 꺾여 서로 부대끼고 있는 갈대밭은 적막의 덩어리 같다. 한바탕
아픈 소란이 지나간 흔적을 갈대밭이 말한다. 격렬한 전쟁이 쓸어간 다
음은 깊은 적막이다. 적막도 풍경이 된다는 말을 무심코 한다.
   겨울갈대밭에서 결승문자, 상형문자 등 문자의 시원을 읽는 착각에
빠진다. 어떤 것은 ㄱ, 어떤 것은 ㄴ, 아니 ㅏ, ㅡ 등 모든 음소를 품은
갈대밭 아닌가. 때로는 인人을 읽고 또 때로는 천川을, 산山을 읽는 즐거
움에 찬다. 무수한 문자의 시원을 갈대밭에서 읽고 보는 재미를 갖는
것은 엉뚱하지만 그럴싸한 일이라며 혼자 즐거워한다.
   갈대밭은 상형문자도서관이다. 이런 생각으로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
고 있으니 문자를 푸는 소리, 그걸 맞추어 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서글
서글 들리는 환청에 잠기기도 한다. 저만치서 물새가 한 마리 날아오더
니 갈대밭 속에 사뿐히 앉는다.
   을숙도는 한때 갈대밭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개발, 발전, 진보라
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무성한 갈대밭은 꺾이고 말았다. 갈대가 밥 먹여
주느냐 하는 약삭빠른 생각은 그 자리에 어엿한 건물을 세우고 갈대밭
의 추억을 왕창 까뭉개고 말았다. 그 갈대밭이 아쉬운 날은 가난하게
명맥을 이어오는 몇 그루 남은 갈대를 강변에서 본다.
   순천 갈대밭은 사람들의 발길을 순천으로 불러들인다. 굳이 낭만파가
아니라도 ‘순천=갈대밭’이다. 뇌리에 찍힌 그 인상 때문에라도 순천을
지나면서 갈대밭을 생각하고 걸음을 그쪽으로 옮기며 호주머니를 푼다.
갈대가 돈을 풀게 한다. 하늘[자연]에 순종할 줄 아는 순천順天이기에 마
음 너그러운 인자仁者의 고장 아닌가.
   을숙도의 갈대밭을 가꾸었으면 우리나라 제일의 갈대공원임을 자랑
할 수 있을 것인데 아쉽다. 철새가 날아와서 갈대 사이에 둥지를 틀 것이
다. 젊은이들이 갈대밭 이랑에서 ‘나 잡아 봐라’하는 술래놀이로 젊은
날의 추억을 새길 것은 당연하다.
   추억을 일구어낼 수 있는 여지는 낙동강 둔치에 그러나 남아 있다.
갈대가 밥 먹여주나 하는 생각을 떨치고 나설 때 낙동강 어느 곳에는
무성한 갈대밭이 조성되고 수많은 젊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될
것이다.
   고개 숙인 갈대는 꺾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로댕)이
다. 생각하는 곳에 갈대는 자라고 생각하는 곳에 아름다운 풍경이 자란다.
봄과 여름은 쑤군쑤군 뻗어 오르는 갈댓잎의 힘이 보는 눈을 시원하
게 한다. 그 반면 가을을 지나 겨울은 칼칼한 매서움이 한파를 이기는
굳은 의지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그 매서움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갈대
의 힘이다.
   살아가는 일이 심드렁해지는 날은 갈대를 찾아 강변길을 걷는다.


 

유병근 -------------------------------------------------------------
1970년 ≪월간문학≫ 등단.
신곡문학상, 부산시문화상(문학) 등.
수필담론집: ≪수필의 맥을 찾아≫ 외.
시집: ≪까치똥≫ 외.